잡동사니

장애인 활동 지원사의 하루

bluesky0321 2024. 10. 16. 15:50

  시립 도서관의 하반기 문화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두 시간씩 진행되는 글쓰기 수업은 선생님이 추천하는 책 소개와 함께 시작된다. 도서관에 비치된 책 중 선생님이 읽어보고 글쓰기에 도움될 만한 책을 골라 소개한 후 내용과 관련된 주제를 제시하면 수강생들은 십분 정도 주어진 시간에 각자 글쓰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십분 동안 몇 줄 쓰지 못하고 끙끙거리기도 했는데 수업횟수가 늘어 갈수록 이제 곧잘 쓰기도 한다. 잘 쓰고 못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단 쓴다는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선생님 덕분이다. 쓴 글을 원하는 사람만 돌아가며 읽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내가 쓰는 것보다 남이 쓴 글을 듣는 것도 글쓰기에 매우 도움이 되는 듯하다. 선생님이 소개한 김민작가의 “오나이쓰!” 란 책에서 자신의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30자 이내로 적어보라는 내용이 있어서 “생각 즉시 행동하고 행동한 결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 자유인”이라고 적어 보았다. 급한 성격이지만 평생의 직장생활을 무난하게 마무리한 후 생긴 여유로움에서 오는 자평이다.

  35년의 직장생활을 마감하는 정년퇴임식 날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정말 어깨의 짐을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웃으면서 후배들과 인사를 하고 직장을 떠났다.
그리고 늘 생각해온 대로 실업급여를 받는 9개월을 포함하여 1년은 마음껏 놀아보리라 생각했다. 제주 올레길 걷기, 영남알프스 9봉 완등하기,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하기, 몽골 초원 걷기, 유럽 렌터카 일주여행 등 생각에만 머물렀던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그 동안은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으로 여행 다닌 시간이 더 많았다. 9개월간의 실업수당 지급기간이 끝나기 전에 국민연금 조기수령 신청을 했다. 64세부터 정상 수령이지만 2년 먼저 수령하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연금 수령시기를 늦출수록 받을 수 있는 금액이야 많아지겠지만 정작 돈이 필요한 시기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젊은 날이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한달 정도 올레길을 걷고 심신이 충만한 상태로 집에 왔을 때 그 동안 아무런 말없이 나의 여행을 지지해주던 집사람이 입을 땠다. “아니 언제까지 놀거예요? 이제 노는 것도 슬슬 질릴 때가 되지 않았어요?” “글쎄! 아직 질리지는 않는데~ 왜 노니까 보기 싫어?” 라며 대화를 이어가던 중 친구 남편이 장애인 아이 돌보는 일을 하는데 당신도 한번 알아보라며 슬쩍 귀띔을 한다. 아마 무 대책으로 놀기만 하는 남편이 약간은 꼴 뵈기 싫었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 귓등으로 흘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노는 게 보기 싫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라고 했지만 집사람의 핀잔이 자꾸 생각이 난다. 도대체 얘기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나 볼 셈으로 경상남도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 문의했다. “장애인 활동 지원사”라는 제도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교육을 이수하고 현장실습을 받으면 장애인 복지관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 설명을 들은 대로 정해진 날에 교육신청을 하려고 경상남도 장애인 종합 복지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교육수강 신청란에 신상정보를 다 적기도 전에 수강정원 50명이 순식간에 마감되고 말았다. 아니 무슨 이런 일이~ 장애인 활동 지원사란 명칭도 처음 들었는데 무슨 교육이길래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인가?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 2023년 9월 교육신청은 실패하고 10월 교육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10월 수강신청은 미리 연습을 충분히 한 덕분에 무사히 교육 수강을 할 수 있었다.

  5주간 하루 8시간씩 40시간의 이론교육과 10시간의 현장실습으로 교육과정은 구성되어 있었다. 교육내용은 장애의 이해, 자립생활과 활동생활의 이해, 인권 및 직업윤리, 장애유형별 활동지원 내용 등 꽤 전문적인 내용이었는데 과목 하나하나 매우 관심이 있어 흥미롭게 수강했다. 무엇보다 평소 장애인과 장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교육내용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다. 장애인들이 처한 환경이 선진국에 비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이 유럽 선진국에 비해 낮은 것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의 복지수준도 마찬가지지만 교육을 통해 그 실상을 숫자로 확인하니 심각성을 더 절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장애인 활동 지원사 업무와 관련 없이 이런 교육을 받게 됨을 감사했다. 하나의 사례로 우리나라의 장애 출현율은 전체인구 중 약 5.1% 정도인데 비해 유럽 주요 선진국의 장애 출현율은 20%를 훌쩍 넘는다고 한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장애 출현 숫자가 많은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것은 장애의 범위를 확대하여 사회적으로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춰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임산부도 일시적인 장애로 인정하여 사회적인 보호를 받게 한다는 사실이다. 정해진 40시간의 교육을 이수하고 장애인 활동 보호기관에 교육을 수료한 증서와 함께 이력서를 제출했다. 다음날 “창원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

  내가 활동 지원하는 이용자는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만 13세 태훈(가명)이다. 태훈이는 자폐스펙트럼장애로 또래의 아이들과는 약간 다르다. 혼자 있길 좋아하고 사색하길 좋아하나 눈 맞춤을 싫어하고 말하기를 싫어한다. 혼자서 흥얼거리며 어깨 춤을 추는 등 자신만의 고유한 세상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바닥에 뒹구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자신의 의사가 잘 반영되지 않을 때는 행동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태훈이가 그나마 몇 마디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도 태훈이 만큼 힘이 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낀다. 태훈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만 보고 알아차리기도 한다. 함께 하는 시간과 비례하여 태훈이의 상동행동이 줄어들고 즐겁게 지내는 날들이 늘어감에 보람을 느낀다.

  태훈이도 또래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한다. 스마트폰으로 주로 뽀로로 시리즈나 타요 등 자동차 관련 내용들을 찾아 본다. 뽀로로는 아이들의 대통령이란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은가 보다. 오래 전 어린 조카들에게 즐겨 보여주었던 뽀로로를 중학생이 된 태훈이는 지금도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마실 것도 뽀로로 음료만 찾는다.  또래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과일, 야채 등은 싫어하지만 자장면, 탕수육을 좋아하며, 특히 불고기, 통닭 등 고기 종류를 좋아한다. 편식은 심하지만 밥 심이 좋아 아주 건강하고 튼튼하여 이제 엄마보다 키가 더 커졌다.​

  장애인활동지원사 교육을 받고 태훈이와 일상생활을 함께 하다 보니 그 동안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인 장애인들의 삶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등록된 장애인의 숫자는 약 260만명 정도이다. 그 중에서 유전, 염색체 이상 등의 선천적인 장애는 약 13.3%에 불과하며, 질병, 사고 등으로 후천적인 장애비율이 약 88%를 넘는다고 한다. 이는 장애인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도 어느 날 갑자기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처우개선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란 것을 말해준다.

  이 일을 하면서 주변에서 태훈이와 같은 자폐스펙트럼장애 및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를 앓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마음 속에 자신만의 성을 쌓은 아이들을 돌보는 부모의 심정과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이름을 대면 알만한 방송인이 자신의 소원은 장애인인 아들보다 3일만 더 사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장애인의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말이 무슨 뜻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달 전쯤 극장에서 “그녀에게”란 영화를 봤다. 기자생활을 하다 첫 아이 출산과 함께 10년째 장애인 엄마로 살고 있는 류승연씨가 쓴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이란 책 내용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장애인을 둔 가족의 애환과 고충을 너무나 잘 표현하여 영화가 끝난 후에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극 중에서 엄마가 장애인(長愛人)은 “오랫동안 길게 사랑 받는 사람” 이라고 해석하고 싶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장애인은 사랑 없이 홀로 서기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장애인 활동 지원사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을 내용들이 고스란히 가슴 속에 다가 왔다.

  장애인 활동 지원사 업무는 장애인이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 목적이다. 이를 통해 장애인 가족들이 일상생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일에 대한 보람이 크다. 태훈이는 하교 후 자폐스펙트럼 장애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언어 및 미술센터에서 치료수업을 받는다. 날이 갈수록 잘 적응하며 자기 표현력이 늘고 상동행동도 줄어들어 선생님들께서 태훈이를 칭찬한다. 단체생활을 어려워하는 아들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학교생활 및 센터수업에도 잘 적응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기뻐하는 태훈이 엄마 모습이 눈에 선하다. 태훈이 엄마는 모든 것이 활동지원사 선생님 덕분이라며 고맙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한다. 누군가 이렇게 기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보람차며, 태훈이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겁다.

  은퇴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크게 생각해 본적이 없지만 우연하게 접하게 된 장애인 활동 지원사 업무를 하게 되면서 장애인의 삶 속에 깊게 들여다 보게 되었다. 평생 직장 생활하면서도 가지지 못했던 이타심과 배려라는 행동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나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으로 하루 하루 보람찬 날들을 만들고 싶다.

경상남도 신중년 인생2막 성공수기 공모전 체출 (202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