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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루스카이의 여기저기 자잘한 여행기

시 모음4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2021. 10. 15.
우리 살던 옛집 지붕 (이문재)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주곤 했다 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 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 이러는 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 나는 빈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던 옛집 지붕에는 우리가 울면서 이름 붙여준 울음 우는 별로 가득하고 땅에 묻어주고 싶었던 하늘 우리 살던 옛집 지붕 근처까지 올라온 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무거워진 나뭇잎을 흔들며 기뻐하고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그해의 나이테를 아주 둥글게 그렸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 위를 흘러 지나가는 별의 강줄기는 오늘밤이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집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천장을 .. 2021. 7. 29.
선운사에서 (김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 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선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2021. 7. 22.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쌓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 2021. 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