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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루스카이의 여기저기 자잘한 여행기
도서 감상

액자 -- 사물들의 미술사2

by bluesky0321 2018. 9. 11.


액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고흐의 해바라기

독일 누이에 피나코테크에 전시된 작품





그 액자는 그림과 동시에 태어나지 않았다

박물관과 함께 탄생한 19세기 액자


에밀졸라의 목로주점은 19세기 파리의 구석구석의

냄새와 소리, 색깔을 고스란히 담아낸 거울같은 소설이다.

여자 주인공은 세탁부인 제르배즈이고

그녀의 남자는 지붕수리공인 쿠포이다.


그런데 이 서민적인 소설의 이미지와 맞지 않게

소설에 난데없이 루브르 박불관이 등장한다.

제르배즈와 쿠포가 결혼식을 하는 날

간소한 결혼식을 마친 이들은 그날에 어울리는 특별한 이벤트로

하객들을 이끌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간다.


12명이나 되는 하객 중에 평소에 루브르 박물관을 가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박물관의 압도적인 전시물의 규모와 

미로같은 통로때문에 두통을 유발한다.


그러나 중세부터 왕정이 무너지기 전까지

예술품을 실제로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오로지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프랑스 혁명이후 

1793년 공화국 중앙미술관이라는 명칭으로 문을 연

루브르 박물관이 목로주점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현대에도 박물관은 마찬가지이나

그러나 결혼식날 가 볼만큼 특별한 장소는 아니다.



위:  작자미상의 루브르 박물관의 아폴론 갤러리, 1880년

중간: 빅투아르 뒤발 작, 루브르 박물관의 그랑 갤러리 전경, 1880년 경

 아래: 샤를 지로, 나폴레온 3세의 박물관, 루브르의 테라코방, 살롱 1866년






모나리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루브르의 최대 화제작 모나리자를 사들인 사람은 프랑수아 1세이다.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로 불러

융숭하게 대접했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루브르의 간판노릇을 하는

모나리자를 비롯해 세례요한, 바쿠스, 알굴의 성묘 등 

여덟 점의 작품을 확보했다.


모나리자 한 점만으로도 관광객을 불러무으는 루브르박물관은

프랑수아 1세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루브르에 전시된 모나리자








17, 18세기 수집가들의 살롱은 그림과 같았다.

아래 그림은 살롱의 전시방식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한 눈에 보여준다.


위: 다비트 테니르스 2세,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의 브뤼셀 회화관

캔버스에 유채, 1651년, 빈 미술사박물관, 빈

아래: 위: 다비트 테니르스 2세,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의 브뤼셀 회화관

동판위에 유채, 1651년,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액자의 황제, 수티







수티의 주문장부는 현재 프랑스 국립고문서관에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일개회사의 주문장부가 흥미로운 것은

수티의 액자들이 현재까지도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있기 떄문이다.


이 장부를 통해 화가 태오도르 샤세리오의 작품 "테피다리움"의

액자제작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1855년에 제작된 이 액자의 크기는 257x133 센티미터

양 사면을 루이 16세 스타일로 마감하고 금칠을 했으며

사면에 카눌리어라고 불리는 가느다란 홈을 파 넣었다.


겉 테두리에는 잎사귀가 둥근 반원모양을 싸고 있는 형태의

금박장식과 아치아래 세로로 길쭉한 반원이 들어가 있는 

달걀 장식을 새겨넣었다.

가격은 500프랑이다.


목로주점 주인공 제르베즈와 쿠포 부부가 하루종일 

일해서 번 돈이 9프랑이니 엄청나게 비싼 것이다.


위: 테오도르 샤세리오 작, 테피다리움 (고대 로마 목욕탕의 미온묙실)

캔버스에 유채, 1853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아래: 수티의 주문서, 프랑스 국립고문서관, 파리






19세기 액자 제작자들이 화룡점정을 찍듯

마지막으로 화가의 이룸이나 생몰연도, 작품제목 등을 새긴

금속판을 액자 아래 가운데에 달았다.


양끝을 둥글게 처리한 금속판위에 금색 페인트를 바른 뒤

마치 만년필로 쓴 듯 고전적인 서체로 그림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새겨놓은 이동판을 "카르텔"이라고 부른다.

19세기에 카르텔만 제작했던 전문업체인 라르도의 이름을 따서

"라르도의 카르텔"이라 부른다.



조각품 아래 숨겨져 있는 카르텔을 읽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남자의 우스꽝스런 모습은 초기의 박물관이

정보를 제공하는데 얼마나 서툴렀는지 잘 나타낸다


그 뒤 등장한 라르도의 카르텔은 간단한 정보만을 담고 있지만

이술 애호가들에게는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아직까지 몇몇 미술관에서 라르도의 카르텔을 단 액자를 볼 수 있다.





반 고흐의 상상의 액자

고흐가 직접 만들고 색칠한 액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반고흐의 액자는 

고흐가 상상한 액자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증언한다

반고흐, 모과 레몬 배와 포도가 있는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1887년, 반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감자먹는 사람들'을 보면

확신컨대 이 그림은 금색 테두리가 잘 어울릴 것 같구나

잘 익은 밀 볏짚 색의 벽지를 바른 벽 위에 걸어도 좋을거야...


고흐가 1885년 4월 30일

동생 테오에게 슨 편지의 서두이다.

동생의 생일 선물로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다.

고흐가 그림공부를 한지 4년만에 첫 결실이자 농민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완성한 첫번째 역작이다.


위: 1885년 4월 30일에 쓴 편지, 반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아래: 반고흐 감자먹는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1886년 반고흐 미술관








위: 1888년 4월 3일에 쓴 편지, 반고흐 미술과, 암스테르담

아래: 반고흐, 아를의 도개교, 캰버스에 유채, 

1888년 크뢸러뮐러 미술관, 오테를로

액자는 고흐의 편지내용에 따라 가상으로 만든 것임.






액자뿐만 아니라 고흐가 편지 속에 남겨놓은 

침실의 색채는 지금과 다르다

고흐가 그린 침실의 생생한 새채를 느껴보려면 오로지 

상상에 의존해야 한다


반고흐, 침실, 캔버스에 유채, 1888년

반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액자는 가상으로 만든 것임





작은 배나무를 한없이 서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이 액자가

바로 반고흐가 상상했던 액자이다.

반고흐, 작은 배나무꽃, 캔버스에 유채, 1888년

반고흐 미술관,암스테르담





위: 1888년 11월 10일에 쓴 펀지, 반고흐 미술관,암스테르담

아래: 반고흐, 분홍 복숭아나무, 캔버스에 유채, 1888년

반고흐 미술관,암스테르담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피사로의 액자는 

19세기 금색 액자이다.

금색액자의 그림은 클래식한 느낌을 주지만 피사로의

오리지널 액자의 그림은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다.


당시 인상파들이 추구했던 시각혁명이 얼마나 현대적인가를

한 눈에 보여준다

같은 그림이라도 액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위: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피사로의 그림과 액자

카미유 피사로, 봄 꽃핀 자두나무, 1877년, 오르세 미술관

아래, 당시 피사로의 액자를 바탕으로 만든 액자






고흐가 초상화를 그리는 바람에 불멸의 인물이 된

아를의 우체부 룰랭의 부인을 모델로 한 "자장가"와

오늘날 고흐하면 딱 떠오르는 "해바라기" 그림이 있다.


고흐는 1888년과 1889년에 걸쳐 일곱 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다.

고흐가 귀를 자른 뒤 야반도주하듯 아를을 떠난

고갱은 미쳐 챙기지 못하고 고흐의 작업실에 남겨두었던

습작과 두 점의 해바라기를 맞바꾸자고 제안한다.


고흐는 이 제안에 처음에는 정말로 어이없어 하다가

이내 속없는 사람처럼 고객에게 줄 심산으로 고갱방에 걸려있던

해바라기를 복제하여 두 점을 그렸다.

그리고 한 범을 더 그려서 모두 일곱 점을 완성했다.


그중 1888년에 그린 파란 바탕의 '세송이의 해바라기'는 

고흐가 마지감게 두송이를 더 그리는 바람에 '다섯송이의 해바라기'기

되었는데 제2차 시계대전 시 미군이 요코하마를 폭격했을 때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 남은 고흐의 해바라기는 모두 6점이다.


반 고흐, 열두송이의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채, 1888년

노이에 피나코테크, 뮌헨




위: 1889년 5월 23일에 쓴 편지, 반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가운데: 반고흐, 자장가-룰랭부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888년, 

노이에 피나코테크, 뮌헨

아래: 반고흐, 열다섯 송이의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채, 1888년,

내셔널갤러리, 런던





모더니즘을 향한 한 걸음, 드가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 카몽도


카몽도 가문은 원래 이베리아 반도를 떠돌던 유대인인

세파리디였다.

카몽도라는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1802년 백작과 이름이 같은 증조 큰아버지인 '이사크 카몽도'가

콘스탄티노플에 은행을 세우면서부터다.


이사크는 정부에 자금을 융통해주고

세금을 운용해 투자하는 일을 맡으면서 재산을 모았다.

후사가 없던 이사크가 1832년 페스트로 사망하자 자연스레

동생인 아브라암 살로몬 카몽도가 은행을 물려받았다



좌: 카몽도 저택, 니심카몽도 박물관, 파리

우: 아브라함 살로몬 카몽도, 1868년경, 니심카몽도 박물관, 파리

아래좌: 이사크 카몽도, 니심카몽도 박물관, 파리

아래 우: 카몽도 저택내부, 니심카몽도 박물관, 파리






샹젤리제 82번지 저택은 그 자체로 박물관이나 다름이 없다


위: 이사크 카몽도의 샹젤리제 82번지 저택, 1910년경, 니심카몽도 박물관, 파리

아래: 샹젤리제 82번지 저택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이사크 카몽도, 1920년경, 니심카몽도 박물관, 파리





에드가 드가, 꽃다발을 들고 무대 위에서 인사하는 무희, 

캔버스에 표구된 종이에 파스텔, 1878년, 오르세미술관, 파리





드가, 

그는 누구인가?


드가는 출생부터 여타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랐다

소위 금수저 출신이다.

덕분에 드가는 요즘도 파리 최고의 명문학교로 꼽히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아버지는 일반적인 부르조아들과는 달리

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을 위해 파리의 콩코드 광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건물 4층에 아틀리에를 마련해 주었다.



위: 에드가 드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63년, 굴벤키안 미술관, 리스본

아래: 에드가 드가, 벨렐리 가족, 캔버스에 유채, 1858~1860년,

오르세미술관, 파리






이사크 카몽도 백작은 1911년 5월 8일

루브르에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긴다.


"나는 모든 나의 컬렉션을 컬렉션 운영비용으로 쓰일 

10만 프랑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한다.

루브르 박물관은 모든 컬렉션을 기증받아야 하며 동시에 전시해야 한다

루브르 박물관은 기증받은 나의 컬렉션을 오십년동안 

나의 이름이 명시된 별도의 공간에 전시해야 한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시,

나는 프티팔레에 컬렉션을 기증하겠다"


루브르는 고민에 빠졌다.

총 감정가가 8백만 프랑이나 되는데다 이견이 없는

1급 작품들을 기증받는데 루브르는 왜 고민에 빠졌는가?


컬렉션 중 136점에 달하는 모네, 마네, 드가, 세잔 등의 

인상파 작품들을 전시해야 한다는 단서조항 때문이었다.


당시 루브르는 사후 10년이 지나지 않은 예술가의 작품은

전시하지 않는다는 내규가 있었기 때문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잔, 모네, 피사로, 마네, 고흐 등의 

작품이 루브르의 자랑이 되고 있다.



위좌: 에드가 드가, 카페에서-압셍트, 캔버스에 유채, 1875~1876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위우: 에드가 드가, 발치료사, 캔버스에 표구된 종이에 유채와 테레빈유, 1873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아래좌: 에드가 드가, 화장실에서 왼발을 닦고 있는 여인, 카드보드에 파스텔, 1886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아래우: 에드가 드가, 발레수업, 캔버스에 유채, 1873~1876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모두 같은 액자에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드가의 오리지널 액자들이다.

드가의 노트에 남아있는 액자 착상과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


위좌: 위우: 에드가 드가, 오페라 극장 무대 뒤의 뤼도비크 알레비와 알베르 블랑제-카베, 

종이에 파스텔과 템베라, 1879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위우: 에드가 드가, 목욕을 하고 바닥에 누워있는 여인, 베이지색 종이위에 파스텔, 

1885년경, 오르세 미술관, 파리

아래좌: 에드가 드가, 목욕을 하고 목을 닦고 있는 누드의 여인, 

카드보드에 붙인 모조지에 파스텔, 1898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드가의 액자 스케치 형태와 또같은 모양의 오리지널 액자들


위: 에드가 드가, 판화수집가, 캔버스에 유채, 1866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아래: 에드가 드가, 휴식을 취하는 무희, 종이에 파스텔과 구아슈, 1879년, 개인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