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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루스카이의 여기저기 자잘한 여행기
도서 감상

아버지의 해방일지

by bluesky0321 2022. 9. 25.

소설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며칠전 유시민 작가가 어느 방송에서 언급한 기억이 있었는데
휴일아침 류근시인의 페북멘션에서
정지아 시인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소개를 보았다.

멘션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설가 정지아는 제가 나온 학교의 학과 선배이십니다.
후지지요, 뭐.  
그때는 나라도 하늘도 선배도 학교도 다 후졌습니다.
정지아 선수는 더 후져서, 까만 콩자반 같았어요.
까맣고 반짝였지요.

제가 군대 갔다가 제대하고 돈이 없어서 복학 못하고 빌빌거리던 1990년도에
그 유명한 <빨치산의 딸>이라는 소설을 써서 단숨에 스타가 되었습니다.
하아~ 단숨에 국가보안법 위반, 판매금지, 실천문학사 대표의 구속 수감 등...
후진 세월이었어요. 아이고~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명한 빨치산 맞습니다.
정지아라는 이름조차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따왔다는 썰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봄에 그에게 전화해서는...
누나, 나는 누나와 이 봄과 꽃잎들에게 O하고 싶네...라고
고백했다가 사망 당할 뻔도 하였습니다.
정지아 작가는 그토록 매력적입니다.
소설가들의 선생이라는 말까지 듣는다는군요.

우리 선배 이창호 형이,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께서 연락하셨어요.
이번에 정지아 작가 소설이 나왔는데 진짜 좋고나요~!
정지아의 문장과 사유는 유려하고 탁월합니다.
주말엔 무얼 하시나요? 창비 소설 한 권 읽는 거 어떠신가요?

저는 창비에서 이렇게 깜찍한 책표지를 맹글었다는 사실조차 막 흥미롭습니다.
이 소설은 이미 베스트셀러라지요.
김건희 박사님께도 권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류근시인의 페북멘션은 한 편의 시와 같다.
매일 그의 페북 멘션을 읽는 것이 즐겁다.

그래서 바로 교보문고로 뛰어가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샀다.
간김에 유시민의 유럽 도시여행2와 김훈의 하을빈도 함께 사서
집에 오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하여 하루를 넘기기 전에 모두 읽고 말았다.

디지털 영상문화에 찌든 요즘 세태에
아나로그 감성의 책장을 넘기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책 속에서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책장을 덮어야 했다.
하루종일 책과 함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해발일지는
아버지는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아버지는 죽었다는 글로 시작된다.

아버지 고상욱씨는 위장자수한 빨치산으로 20여년의 감옥생활을하고
풀려나 같은 빨치산 남부군 출신의 아내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딸 고아리와 함께 힘든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내었다.

이야기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고
상주로서 고아리가 맞아하는 문상객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빨치산도 아니고 빨갱이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정지아 작가의 깔끔한 문장과
아버지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과의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풀어내어 재미와 감동을 전해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다.

내용 중에 한 장면을 소개하면

“아이, 니 오거리슈퍼 손녀지야?"
황사장이 알은척을 하자 아이가 머뭇머뭇 내 쪽으로다가왔다.
오거리슈퍼 손녀라면 나도 아이 아버지를 몇차례 본 적이 있었다.
허리 꼬부라진 자기 어머니가 세평 남짓한 좁은 가게에 틀어박혀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는 슈퍼 밖에 내놓은 평상에 앉아 술로 세월을 보냈다.
무엇이그를 좌절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도 작은아버지처럼술이 유일한 벗인 듯했다.
누구와 대작을 하는 꼴도 본 적이 없으니.
필시 그의 딸일 아이는 열일고여덟이나 됐을까?
앳된 얼굴이었다. 피부가 유달리 가무잡잡했다.

"우리 아버지를 알아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데요?"
흔하디흔한 삼선 슬리퍼를 시멘트 바닥에 문지르며 아이가 머뭇거렸다.
“.....…담배 친군디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든 넘은 아버지의담배 친구라니 기분이 상했는지 아이가 눈만 치켜뜬 채 나를 노려보았다.
"어쩌다가......”
눈꼬리는 사나워도 넙죽넙죽 말은 잘 받았다.
“교복 입고 담배 피우다가 할배헌테 들케가꼬 꿀밤을맞았그마요.
양심 좀 챙기라대요. 최소한 교복은 벗고 피우는 것이 양심이라고 ・・・・・・”
"그래서? 담부터는 양심 챙겼어요?"
“아니요. 학교를 때려쳤는디요?"

학교를 때려친 아이와 아버지는 같이 담배를 피우면서 친구가 된 것이다.
조문할 요량으로 온 것인지 아이가 접객실 쪽을 기웃거렸다.
국화꽃 한송이를 제단에 올린 아이는 가만히 서서 아버지 영정 사진을 응시했다.
조문이 처음인 듯했다.
“절할래요? 두번 절하면 돼요."

아이가 시킨 대로 두번 절을 올렸다.
나와의 절은 생략했다. 절을 올리고 난 아이가 쓱 얼굴을 훔쳤다.
나는 모르는 둘만의 사연이 있는 듯했다.
그냥 가려는 아이를 한갓진 안쪽 접객실 테이블로 이끌었다.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라면 응당 그러했을 테니.

“우리 아버지랑 친했나보다."
아이가 콜라를 마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헌다고.
애들은 천날만날 놀리기만 했는디 ・・・・..”

엄마가 베트남 출신인 모양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미제국주의 운운, 아버지다웠다.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담배를 피우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이가 겪어왔을 세월을
나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알았을 테고 아버지 방식대로 위로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육개장을 먹던 아이가 식탁에 놓여 있는 소주병을 한참 쳐다보고는 다시 눈물을 훔쳤다.
"붙으면 술 사준다고 해놓고・・・・・・ 할배는 씨… 약속도 안 지키고....”

아버지는 공부하자고 아이를 매일 졸랐다.
때로는 담배를 사주며 구워삶았다.
아이는 아버지 꼬임에 넘어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몇달 뒤 시험을 치른다고 했다.
시험에 붙으면 술을 사주겠노라, 아버지는 아이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단다.

“그 술, 아버지 대신 내가 줄까요?"
미성년자긴 하지만 학생은 아니니 한두잔쯤이야 문제될까 싶었다.
아이가 익숙하게 소주잔을 내밀었다.
한잔을 한입에 털어 넣은 아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술은 첨인가보네?"
“아니요! 많이 마셔봤는디요!"
그 나이답게 아이가 호기롭게 외쳤다. 아버지가 이아이와 친해진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먹어본 폼이 아닌데?"
"쐬주라서 그래요. 맥주는 엄청 잘 마시는디요? 할배보다 더 쎄요!
근디 할배가 맥주도 술이냠시로 술은 쐬주라고, 자개가 쐬주맛 갈체준다고 그랬는디…
졸라 쓰기만......”
쌍욕을 내뱉은 아이가 제풀에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샛노랗게 머리를 염색했어도 아이는 아이였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이가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쏘아붙였다.

“담에는 핑크로 염색할건디요!"
날 선 시선만 받으며 살아온 모양이었다.
그런 시선에 지지 않으려는 아이의 기세가 아버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핑크가 더 어울리겠네."
머쓱해진 아이가 얌전히 육개장을 먹기 시작했다.

“미용사 자격증 딸라고요. 할배가 자개 머리로 연습하라고 했는디………
첫 머리칼도 월매 없음시로."
아이가 또 쓱 눈물을 훔쳤다.
검정고시에 미용사 자격증에, 학교를 떠난 뒤로 아이는 제 앞가림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학생보다 더 열심히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노란 머리만 보고 노는 아이라 함부로 판단한 게 미안했다.
고봐라. 내가 뭐랬냐? 믿으랬제?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분명 그렇게 꾸짖을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사회주의 사상으로 자본주의 세상을
힘겹게 살아내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져있다.
결국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공감이 크다.
가슴에 울림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