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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루스카이의 여기저기 자잘한 여행기
도서 감상

유럽도시기행 Ⅱ (유시민)

by bluesky0321 2022. 10. 11.

작가 유시민은

2020년 유럽도시기행 Ⅰ편 출판에 이어

2022년 가을 유럽도시기행 Ⅱ 편을 출간했다.

 

2편에서는 오스트라이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

체코 프라하, 그리고 독일의 소도시 드레스덴을 소개하고 있다.

1편을 출간한 뒤 코로나19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해

2편 출간이 많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1편에서는 밑줄을 그어가며 매우 신비롭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에 비해 2편의 신선함은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형만한 아우없다는 말 때문일까?

 

그냥 내가 유럽도시기행 2편을 만나는 느낌이

그렇다는 뜻으로 내용이 부실하다든가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유작가는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2권의 중심은 빈이다.

문화 예술에 한정할 경우

빈은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수준이 높고 가진 것이 많다.

오랜 세월 합스부르크제국의 수도였고,

19세기 후반 짧은 기간에 낡은 중세 도시에서 벗어나

유럽의 첫손 꼽는 문화 예술 도시로 도약했으며,

'비엔나커피'에서 모차르트의 음악까지 다양한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특히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여행자는 빈을 빠뜨리지 않는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만큼

정치·경제·문화 · 역사 등 모든 면에서 빈과 깊이 얽혀 있다.

하지만 도시 공간의 구조와 문화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다.

 

빈이 지체높은 귀족이라면

부다페스트는 모진 고생을 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간직한 평민 같았고

프라하는 걱정 없이 살아가는 '명랑소년'을 보는듯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나

재활 중인 중년 남자라고 해도 될

드레스덴은 프라하에 갈 때들르기 좋은 도시여서 2권에 넣었다.

2권의 표지의 그림들은

빈은 시씨 황후, 부다페스트는 언드라시 백작,

프라하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다.

드레스덴은 딱히 내세울 대표 인물을 정하기 어려워서

랜드마크 1번에 해당하는 성모교회를 선택했다.

 

나는 도시의 건축물, 박물관,미술관, 길,,광장, 공원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콘텍스트(context)'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도시는 콘텍스트를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며,

그 말을 알아듣는 여행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독자들과 공유하면 좋겠다고

판단한 정보를 추려서 책을 썼다.

그 정보가 객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 도시들의 여러 공간에서 누구나 같은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그렇듯 여행도 정답은 없다.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나가면 그만이다.

이미 밝혔듯, 이번에도 내가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평가는 하나뿐이다.

"흠, 이 도시에 이런 게 있단말이지. 나름 재미있군."

코로나19 사태의 끝자락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빈 랜드마크 슈테판성당

 

빈의 랜드마크는 당연히 슈테판 성당이다.

약 137m의 높이에 달하는 대성당으로,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진 곳으로 유명하다.

 

12세기 중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1359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고딕 양식으로 증축하여,

두 가지 건축 양식이 어우러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외관의 23만 개의 타일 지붕이 시선을 사로잡으며,

성당 내부에는 다양한 제단과 지하 묘지 '카타콤',

빈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두 개의 탑이 자리하고 있어

많은 여행객이 찾는다.

책 본문 내용을 옮긴다.

 

오래전 처음 빈에 갔을 때,

어설프게 알면 아예 모르느니만 못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슈테판 성당이 독일어로 슈테판스'돔'(Stephans dom')이니까

지붕이 반구 형태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돔'은

가톨릭의 대주교좌 성당을 가리키는 말일 뿐

지붕의 모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독일 사람들이 '쾰르너돔'이라고 하는 쾰른의 대성당에

쏟아져 내릴 듯 무시무시한 고딕 첨탑이 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슈테판 성당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온몸에 지니고 있다.

원래는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었는데 큰불이 나서 무너졌다.

그 자리에 14세기 초부터 2백여 년 걸려 새로 성당을 지었는데

종교 건축양식의 유행 변화를 받아들여 중앙 회랑과 지붕을 고딕 양식으로 바꾸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흔적은

성당 전면에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길이 107 미터 너비 34 미터, 축구장만 한 땅을 딛고 선

본당 건물에는 첨탑이 넷 있는데

남탑인 슈테플(Stefl, 슈테판의 애칭)이 136 미터로 단연 높다.

벽돌을 생선 뼈 모양으로 짜 맞춘(herring bone) 지붕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 '쌍두(雙)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내부시설은 권력자의 취향과 유행에 따라 여러 차례 달라졌지만

중앙설교대를 비롯한 중심 공간을 고급 대리석과 화려한

귀금속으로 꾸민 것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유럽의 크고 오래된 성당들이 대개 그러했듯

슈테판 성당도 왕가의 영묘였다.

중앙 제단 가까이에 놓인 프리드리히 3세(1415-1493)의 대리석 관에는

모음 다섯 개(A.E.I.O.U.)가 새겨져 있는데,

"오스트리아는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존재하리라"는 라틴어 문장

또는 "온 세상이 오스트리아에 복속하리"라는 독일어 문장의

단어 첫 글자를 적은 것이라고 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반을 만들었고 교황과 좋은 관계를 맺어

이곳을 대주교좌 성당으로 승격시킨 왕이었으니 거기에 관이 있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왕 노릇 하기를 힘겨워했고 헝가리의 마차시 1세한테 도시를 빼앗기고

쫓겨나기도 했던 사람의 관에 새길 문장은 아니지 않나 싶었다.


빈에서는 원하든 원치 않는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 1830-1916)황제를 만나게 된다.

대성벽을 철거한 그는 빈의 '넘버3 셀럽'이다.

왕궁박물관·미술관. 카페 · 기념품점 등 어디나 초상화와 사진이 걸려 있다.

벗어진 머리에 허연 카이저 콧수염을 달고

훈장이 주렁주렁 붙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요제프 황제는 열여덟 살이었던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과 사회적 혼돈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큰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한테 왕위를 넘겨받았다.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68년이나 재위했던

그는 만만치 않은 정치적 수완을 과시했다.

 

처음에는 시민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는 헌법을 제정해

민심을 수습했지만 혁명의 폭풍우가 잦아들자

그 헌법을 파기하고 전제군주제로 복귀했다.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등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황제는

1914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의 책임을 물어

세르비아를 침공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겼다.

유럽이 전쟁의 화염에 불타고 있었던 1916년세상을 떠났으니

합스부르크제국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였다고 할 수있다.

1918년 겨울에 일어난 자유주의혁명으로

합스부르크제국은 영원히 사라졌다.

독일어를 쓰는 주민이 다수인 지역에는 오스트리아공화국이 들어섰고

제국의 나머지 영토에는 여러 국민국가가 생겨났다.

 

 

 

헝가리는 국토가

대한민국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서울시와 비슷하다.

오스트리아(북서), 슬로바키아(북),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동),

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남)에 둘러싸인 완벽한 내륙의 평원이다.

 

고대에는 스키타이족과 켈트족, 판노니아족 등이 살았고

B.C.1 세기 후반 로마제국 군대가 들어와 4백 년 동안 지배했다.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5세기에 훈족의 왕 아틸라가 잠시 왕국을 세웠고

6세기부터 9세기까지는 몽골게 아바르족이 부다페스트 일대를 차지했다.

머저르 죽은 아틸라 시대에 흑해 주변의 초원지대를 떠나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수백 년에 걸쳐 다뉴브강과 카르파티아산맥 사이의 대평원을 잠식한 끝에

슬라브족을 밀어내고 헝가리왕국을 세웠다.

헝가리왕국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이슈트반이 죽은 후 내전으로 세력이 약해졌고,

13세기 중반 몽골 침략 때 치명상을 입었다.

몽골 기병은 헝가리의 드넓은 평원을 거침없이 짓밟았고

머저르왕국은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15세기 후반 마차시 1세의 마지막 황금기가 끝난 후

독립 공화국을 설립한 1918년까지 머저르의 후예들은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고 살았다.

1867년의 역사적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성립한 후에야 헝가리 사람들은

독일어와 함께 자기의 언어도 공용어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략과 지배를 겪었으며

새 헌법을 채택하고 자유 선거를 실시한 1990년에 처음으로

독립한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부다페스트는 표정이 환했다.

거리와 집들은 빈에 뒤지지 않을 만큼 밤낮없이 화려했다.

5백 년 동안이나 외부의 지배를 받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오래도록 평화와 번영을 누린 도시 같았다.

그러나 수많은 광장과 지하철, 왕궁, 성당, 국회의사당, 박물관 등

대표적인 건축물의 연혁을 보면 19세기 중엽까지는

정말 볼품없는 도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빈이 대성벽 철거 이후 새로 태어난 시기에 지었다.

그래서 부다페스트에도 빈처럼 고딕, 르네상스, 고전 양식 등

온갖 형태의 거대한 건축물이 있으며

국회의사당은 그 모든 요소를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좋게 말하면 '절충주의', 냉정하게 말하면 빈을 모방한 것이다.

하지만 헝가리 사람들을 비하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민족의 독립과 경제적 부흥을 이루겠다는 열망,

수백 년 만에 찾아온 역사적 기회에 대한 기대감,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겠다는

자부심을 그런 방식으로 표출했다.

그게 잘못일 수는 없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석공 일을 배우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쟁포로가 되기도 했던

너지 임레는 공산주의자였다.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는 데 참여했고

국제공산주의조직 코민테른의 헝가리 대표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식량 부족에 신음하는 현실을 보고

정책 노선의 전환을 결심했다.

 

강제 수용소를 폐쇄하고 집단농장을 해체하는 한편

서방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고 자율과 창의를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내가 만난 동상은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고 있었다.

 

 

국회의사당의 언드라시 기마상 근처에서 강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 세체니 다리 쪽으로 걸었다.

강변에 금속으로 만든 남녀노소의 신발 수십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 신발의 주인들은 총을 맞고 강에 버려졌다.

그곳에 그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갔는데도 눈물이났다.

그저 무섭기만 했던 테러하우스와는 달랐다.

그렇게 작은 조형물이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빗물이 깨끗하게 고인 구두 너머로 도나우의

탁류가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유대인을 너그럽게 대했기 때문에

헝가리에는 유대인이 많았고 부다페스트에 큰 게토가 있었다.

나치는 80만 명 넘었던 헝가리 유대인 가운데 60만 명을 죽였다.

43만여 명을 열차에 태워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로 보낸

1944년 5월부터 7월까지가 학살의 절정기였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고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빼앗은 돈과 귀금속을 소위 '황금열차'에 실어 베를린으로 가져갔다.

독립할 때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영토와 인구를

절반 넘게 빼앗겼던 헝가리 정부는 그것을 되찾으려고

나치와 협력했다가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권력을 잡은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간섭과 지배를 받아들였지만 민중은 그렇지 않았다.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제국뿐 아니라 나치 독일과 소련도

민족의 자주권을 억압하는 외세로 여겼다.

너지 임레 총리의 개혁정책과 시민들의

반소 무장투쟁의 동력은 그런 정서였다.

강변의 구두는 유대인들의 가슴 미어지는

참극과 헝가리 사람들의 지워버리고 싶은 범죄행위를 되살린다.

거기서 유대인을 학살한 범인은 독일이 아니라 헝가리 사람들이었다.

독일 군대가 소련군에게 밀려 부다페스트를 떠나자

나치당의 헝가리 버전인

'화살십자당 Nyilaskerestes Part)'의 살라시 (Sailasi Ferenc)가 권력을 장악하고

1944년 11월부터 소련군이 들어온 1945년 2월까지

다뉴브 양편 둑에서 1만 명 넘는 유대인을 총살했다.

헝가리인은 테러하우스에서는 피해자로,

다뉴브 강변에서는 가해자로 남아 있었다. 

 

 

 

 

 

 

 

틴 성당은 높은 곳에 있지만 군림하지 않는다.

도시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겨 있다.

구시가 광장에서 성당을 보니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찾아보니 성당 정면 레스토랑 건물과 왼편 국립 미술관이 있는

궁전 사이 골목 안쪽에 입구가 있었다.

 

정면과 측면뿐 아니라 후면에도 민가들이 빼곡했다.

파리의 노트르담과 빈의 슈테판 성당 주변도중세에는 그랬는데,

정부가 주변 민가와 건축물을 철거하고 도로를개설해

지금처럼 만들었다.

틴 성당을 둘러싼 민가는 프라하의 지배자들이

나폴레옹 3세나 요제프 황제처럼 도시를 과격하게 개조하지않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게다가 틴 성당은 정말로 오래된 건축물이었다.

시커멓게 풍화한외벽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난 불타거나 무너진 적이 없어!' 특별히 튼튼하게 지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프라하에는 화약탑을 비롯해

외벽이 시커먼 중세 건축물이 여럿 있다.

대화재나 폭격, 혁명,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당하는

비극을 겪지 않았다는 뜻이다.

 

보헤미아가수많은 전쟁에 휘말렸는데도

중심도시 프라하는 참화를 피했다.

그래서 구시가의 중세 건축물과 신시가의 바로크 스타일 집들이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프라하는 '아무데서나 사진을 찍어도화보가 된다'는

명성을 얻었다.

 



멀리서 본 카렌교(Karliv most)는 콩나물시루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남들과 부딪치지 않고 걸을 수는 있었다.

카렌 4세의 명으로 14세기 후반 50년 동안 공사를 해서 만들었다는 

이 보행자 전용 다리는 평지인 구시가와

비탄인 프라하성 일대를 연결했다.

 

폭은 10미터 길이는 5백 미터 정도인 카렌교는

아침부터 밤까지 사람으로 가득했다.

강을 건너려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리 자체를 보고 걷고 즐겼다.

다리를 따라 양편 교각의 윗면에 줄세워 만들어 둔

서른 개의 조각상이 큰 볼거리였다.

 

원본을 박물관에 보관하고 복제품을 설치해 두었다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테네의 카리아티드도 박물관의 원본보다

아크로폴리스 에레크테이온의 모조품이 더 좋았던 것처럼

카렌교의 조각상도 원래 자리에 서 있는

모조품이 박물관의 진품보다 나았다.

조각상의 주인공들을 굳이 검색할 필요는 없다.

예수, 성모, 세례요한 그리고 바츨라프를 비롯한

보헤미아의 기독교 성인들이니까.

부계는 룩셈부르크 왕가이고 모계는 보헤미아 왕가였던 카렌 4세는

1346년 보헤미아왕으로는 처음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와 체코어 독일어 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구사했으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전쟁에 참가했던

 

그는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았고

신시가지를 조성했다.뿐만 아니라

중부 유럽 최초의 대학을 설립해 관료와 법률가를 양성하고

학문 연구와 예술 활동을 장려했다.

프라하성과 성 비타 성당건축도 그가 주도했다.

자녀들의 정략혼인을 통해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고

스위스 티롤 지방과 이탈리아 북부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세 아들과 조카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체코 사람들은 보헤미아의 황금기를 연 군주였던

그를 국가의 창설자로 여긴다. 대학과 교량과 광장 등

그의 이름을 붙인 곳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카렐교 조각상 가운데 단연 인기 높은 인물은

얀 네포무츠키(JanNepomucky)였다.

이 사람은 '네포묵'이라는 지역 출신으로 교회법을 공부하고

프라하 대주교 대리를 했던 얀 벨플린 신부다.

가톨릭교회와보헤미아 왕가 사이에

큰 다툼이 벌어졌던 1393년 카렐 4세의 아들바츨라프 4세가

그를 죽이고 시신을 강에 던졌다.

3백 년도 더 지난후 교황청이 성인으로 추존한

그의 청동 조각상은 영험한 힘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체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소원을 빈다.

청동상은 높아서 손이 닿지 않아 기단의 부조를 만지며

기도하기 때문에 그 부분만 녹이 벗겨져 반질반질했다.

 

 

 

 

 

 

 

 

 

오늘의 빈은 요제프 황제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드레스덴은?

왕궁의 마구간 건물 외벽에 만든 '귀족들의 행진' 부조 맞은편

작센주 고등법원 앞에서 유력한 후보를 발견했다.

 

작센왕 아우구스트 1세(Friedrich August 1, 1750-1827)다.

법원 청사는 19세기에 지은 신분제 의회 '슈탠데하우스(Ständehaus)'였다

. '슈탠데'는 '슈탄트(Stand)'의 복수형이고, 슈탄트의 여러 뜻 중에 '계급'이 있다.

직역하면 '여러 계급의 집'이다.

슈탠데하우스 앞 커다란 좌상의 석재 받침대 네 방향에

각각 다른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정면의 문구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데어 게레히테 (Friedrich August der Gerechte)"였다.

게레히트(gerecht)는 '정의로운' 또는 '공정한'이라는 말이니

번역하자면 '공정왕 아우구스트'다.

 

받침대 왼쪽 면의 글귀는

"공정왕의 명성은 영원하리(Der Nachruhmdes Gerechten bleibt ewig)"였다.

흠, 이 사람 같군,

구시가지 한가운데 광장에 이렇게 큰 좌상을 만들어 둔 건

그가 업적이 많은 왕이라서야!' 그렇게 짐작하면서

'공정왕 아우구스트' 뒷조사를 해보았다.

 

바로 옆이시티투어 마차 출발지여서 사람이 북적였지만

그 좌상을 눈여겨보는 이는 거의 없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명성이 영원하기를 바랐던 좌상 제작자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다.

'공정왕 아우구스트'는 특별한 지배자이긴 했다.

그 사람 덕에 역사적으로 폴란드와 가까웠던 작센 지방이 왕국이 되었고

촌동네에 지나지 않았던 드레스덴은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유럽도시기행 1편의 리뷰는 아래 링크를 참고https://rosesense.tistory.com/entry/%EC%9C%A0%EB%9F%BD%EB%8F%84%EC%8B%9C%EA%B8%B0%ED%96%89%E2%85%A0%EC%9C%A0%EC%8B%9C%EB%AF%BC-%EC%95%84%ED%85%8C%EB%84%A4%ED%8E%B8?category=586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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