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1대 총선을 전후로 가장 핫했던 인물 "유시민"
현재노무현재단 이사장이자
자칭 어용지식인
그는 바쁜 정치적 일정 틈틈이 지식인으로써의
면모를 발휘하기 위해교양서적을 집필했다.
정치적 사안이야 널리 알려진터라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먼 훗날 기억의 소환을 위해 조금 기록해 둔다면
채널A 의 이동재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의 무협활극을 꼽고싶다.
"신라젠 이철 사장에게 돈을 줬다는 진술만 해라
실제 주지않았더라도 상관없다.
그다음은 우리가 알아서 다 한다.
유시민 골로 보내고
다음 정권은 빨간당이 잡는다고 이 잡것들은 소설을 썼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다.
그러고도 아직 수사는 미온적이다.
국민들은 이런 잡것들을 잡으라고
180석 이상의 거대여당을 만들어 주었다
여당은 이 힘을 가지고도 검찰, 언론개혁을 밍기적거린다면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이제 유시민의 책으로 돌아와
유럽도시기행1편 (초판)을 소개한다.
인생은 너무 짧은 여행이란 모토로
유럽도시 탐사를 시작한 지식소매상
유시민 소개
서문
낯선 도시에 말걸기
아테네 플라카지구, 로마의 포로 로마노, 이스탄불 골든 혼,
파리 라탱지구, 빈의 제체시온, 부다페스트 언드라시 거리,
이르쿠츠크 데카 브리스트의 집, 이런 곳에 가고 싶었다.
다른 대륙에도 관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스무 살 무렵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 곳은 주로 유럽 의 도시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좋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더 자유롭고 너그럽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소설보다 더 극적인 역사의 사건들을 만났고,
그 주인공들이 살고 죽 은 도시의 공간을 알게 되었다.
삶의 환희와 슬픔, 인간의 숭고함과 비천함,
열정의 아름다움과 욕망의 맹목성을 깨닫게 해주었던 사람과 사건의
이야기를 그곳에 가서 들어보고 싶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나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나 자신과 인간과 우리의 삶에 대해 여러 감정을 맛본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한다.
그러려면 도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길과 공원,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text)'일 뿐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듯 도시의 텍스트도 해석을 요구하는데,
그 요구에 응답하려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한다.
콘텍스트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말한다.
도시의 건축물과 공간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
그들이 처해 있었던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누가, 언제, 왜, 어떤 제약 조건 아래서,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
살피지 않는 사람에게, 도시는 그저 자 신을 보여줄 뿐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지는 않는다.
도시는 대형서점과 비슷하다.
무작정 들어가도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책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걸리고
몸도 힘들며, 적당한 책을 찾지 못할 위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매할 책을 미리 정하고 가서
그것만 달랑 사고 돌아온다면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인터넷서점에 주문하면 되지 무엇 하러 굳이 서점까지 간단 말인가.
대형서점의 가장 큰 장점은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맛보려면 서점의 구조를 미리 파악하고,
어떤 분야 의 책을 살펴볼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사려고 마음먹었던 책이
신간 안내나 서평에서 본 것처럼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는 건 기본이고,
신간 코너와 베스트셀러 진열대, 스테디셀러 판매대, 기획 도서 진열대,
귀퉁이 서가까지 다니면서 이 책 저 책 들춰보는 여유를 누리는 것은 덤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낯선 도시를 여행하면서 들었던,
정확 하게 말하면 '들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여기에 적었을 뿐이다.
그것이 가장 좋은 여행법이라거나 제일 중요한 이야기라고
주장할 생 각은 조금도 없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도시를 다녔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다른 것을 눈여겨보고 다른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
이런 도시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거지!
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아테네
멋있게 나이 들지 못한 미소년
아테네 대표 유적지 아크로폴리스 전경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그리스가 아니라 '엘라다'(Ellada)라고 부른다.
공식 국명도 '그리스 공화국'이 아닌 '엘리니키 디모크라티아'이며,
그리스인이라는 말도 고대 그리스어로 '헬라스'라 불렀다.
영어로 그리스의 정식 국호는
Greek Republic이 아닌 Hellenic Republic이다.
헬라스/엘라스/엘라다 등의 기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그리스인의 시조 헬렌이다.
헬레니즘 문화가 '동방에 전파된 그리스 문화'인데
'그리키즘'이 아니라 헬레니즘으로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내가 오래전
그리스 아테네 시내에 첫발을 내딛을 때 심정이
저자의 심정과 같은 느낌이었다.
올리브나무만 있는 황량하게 느껴지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내가 꿈꿨던 민주주의의 산실 아테네가 저런 모습이었나?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의 자연환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에서 오는 이질감이 있었다.
아테네는 괜찮은 동네에 있는
역사 전문 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크지 않아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둘러볼 수 있고,
주변의 특색 있는 카페와 가성비 좋은 식당들에서
자잘한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 도시에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적을 보기 위해서인데, 고대 유적은
대부분 신타그마 광장에서 아크로폴리스 가는 쪽에 몰려 있는데
여기를 '과거의 공간'이라고 하자.
그 반대쪽 오모니아 광장 방면의 도심과 외곽은
시민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현재의 공간'이다.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을 신타그마 광장 부근과 플라카지구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긴 혼합 공간'이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들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나 철학과는 관련이 없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이 자기네가 믿는 신을 숭배하기 위해
먼 곳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지은 집일 뿐이다.
부서지고 퇴락한 그 신전들은 여행자를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다.
감탄할 만한 예술작품 도 아니었으며
만든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기도 쉽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고대 아테네는,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대부분 B.C.5세기에 만들어졌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기고 델로스동맹(델로스섬에 공동금고를 두었던
도시국가들의 군사동맹) 을 이끌었던
아테네 시민들은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그때 대리석으로 거대한 집을 지어
자기네들이 믿는 신을 모셨다.
승리 의 여신을 받드는 니케 신전,
처녀신 아테나에 봉헌한 파르테논 신전,
전설의 아테네 왕에게 바친 에레크테이온 신전을 다 그 시기에 지었다.
파르테논 귀퉁이의 니케 신전은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에레크테이온은 파르테논 맞은편에서 나름
독자적인 존재감을 과 시하고 있었다.
옷자락을 부드럽게 늘어뜨리고
다리 하나를 살짝 구부린 채 현관 지붕을 이고 선 6개의 여인상은
얼굴이 훼손되어 표정을 알 수 없고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 나갔지만 서로 다른 옷과 머리 모양과
뒤태가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리아티드가 '카리아의 여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테네군으 페르시아와 손잡았던 카리아로 쳐들어가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를 노예로 만들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서 카리아의 여인들에게
에레크테이온의 지붕을 이고 서 있도록 벌을 주었다는 것이다.
카리아티드의 모델이 누구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돌기둥을 여인의 형상으로 조각한 창의적 발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유럽 도시에서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썼기 때문에
돌기둥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현대식 건물에도 카리아티드를 연상시키는
여인상을 부조해 놓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도시의몰락, 신전의 비운
파르테논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하는 순간 빛을 잃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아테나 여신은 파르테논에서 쫓겨 났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독교 예배당이 되었던 파르테논은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메트 2세가 그리스 본토를 정복한 후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모시는 신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의 권력이 흔들리자
아테네 인근 지역에는 종종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왔고
마침내 큰 벼락이 떨어졌다.
1687년 베네치아 군대가
아크로폴리스의 오스만제국 병력을 향해
쏜 포탄이 화약 더미에 떨어져 폭발하는 바람에
신전의 기둥 4개가 무너지고 지붕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영국으로 반출된 그리스 유적
엘긴이 영국대사로 있을 때 훔쳐간 것인데
영국은 되돌려 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아직 런던에 가보지 않았기에
'엘긴의 대리석’은 사진으로만 보았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의 부질없는
영광을 자랑하는 것 말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의
그리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전시실은
그들이 저질렀던 약탈행위를 증언하는
'외국 문화재 포로 수용소'에 지나지 않는다.
귀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이 파괴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랬다는 엘긴의 말이 진심이었다면,
그리스가 문화재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 반환하지 않겠다던
영국 정부의 주장이 진심이었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돌려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고라와 프닉스 언덕은 별 것이 없는
완만한 비탈에 지나지 않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페리클레스가 단청과 박을 입힌
파르테논의 후광을 받으며 민회에서 열변을 토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이곳이 바로 서구 문명의 '빅뱅'이 일어난 현장이다.
그때 여기서 태어난 표현의 자유, 다수결의 원리는
우주배겨복사처럼 현대 민주주의제도에 스며들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맨발에 허름한 튜닉을 걸치고 배회하면서
사람들 을 귀찮게 한 곳도 여기였다.
그는 가구를 보러 온 손님을 붙잡고 물었다.
“좋은 가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그럼 손님은 답한다.
솜씨 좋은 장인한테 주문을 넣지요.”
“그럼 좋은 정치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해대는 사람을 누가 좋아했 겠는가?
그런데도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 부잣집 청년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며,
플라톤과 크세노폰 같은 제자들은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의 언행을 기록했다.
소크라테스는 낮술을 마시기도 했고,
사창가에도 드나들었으며,
페리클레스 같은 유력자들이 자택에서 열었던 향연에 참석해
좋은 음식을 얻어먹기도 했다.
시간여행자의 박물관 산책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전시품이 적지 않았지만, 눈길을 끈 것이 세 가지였다.
첫째는 아크로폴리스 신전의 축소 모형.
이것을 먼저 보고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갔다면
파르테논의 원래 모습을 더 실감나게 상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파르테논을 실물 크기로 재현한 건물의 3층,
엘긴이 뜯어간 프리즈의 부조와 페디먼트 조각상의 위치와 모양을
빈 공간으로 표시해 놓았다.
파르테논의 대리석을 반드시 되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그런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셋째는 2층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세워둔 5개의 진품 카리아티드
사람들은 복제품보다는 진품을 귀하게 여기지만
카리아티드 만큼은 복제품이 진품보다 나았다.
진품이 복제품 같았고, 복제품이 오히려 진품 같았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의 진품
카리아티드
아테네의 황금기를 연 것은 전쟁이었다.
페르시아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두 번 승리함으로써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는 폴리스로 도약했다.
페르시아 제국과 그 후예들은 열 번 넘게 그리스와 전쟁을 했는데,
변명할 여지없이 참패한 전투는 딱 그 두 번이었다.
거대한 제국
건설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는
B.C.490년, 조공 바치기를 거부한 아테네에 본때를 보이려고
병사 2만 명을 함선 600척에 태워 보냈다.
아테네의 자유민과 농민 1만 명은 사흘 먹을 식량을 챙겨
북동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해안의
마라톤 평원에 진을 쳤다.
아테네는 여러 면에서 운이 좋았다.
크세르크세스가 쳐들어오기 3년 전
아티카 반도의 남부에서 거대한 은광을 발견했는데,
마침 걸출한 군사 전략가 테미스토클레스가 최고 집정관 자리에 있었다.
델피 신탁까지 동원해 민회를 설득한
그는 반대파를 도편 투표로 추방 하는 극단적인 수단까지
동원한 끝에 은광의 재정으로 선원 200명을 3단으로 배치해 노를 젓는
전함(삼단노선)을 건조하는 데 성공했다.
선수에 청동 충각(衝角, 군함의 함수 밑에 있는 뾰족하게 돌출된 부분.
적의 선박과 충돌할 시 상대 선박을 부수어 침몰시키기 위한 장치)과
칼날을 장착한 이 전함 은 시속 24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었다.
명예욕에 불타는 귀족과 자산 가들을 함선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자,
그들은 자기 돈으로 선원을 고용하고 노예를 투입해 노를 젓게 했다.
살라미스섬 바로 앞에는 작은 섬들이 있고
해협의 폭은 1킬로미 터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해협의 바다는 잔잔하며 수심도 그리 깊지 않다.
아테네 해군은 섬의 작은 만에 결집해 있었고,
지도부는 돌출한 언덕에서 적선의 동향을 살폈다.
해협에 들어선 2천여 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거센 맞바람을 만났을 때
아테네의 전함들이 바람을 등지고 달려들었다.
이 전투에서 마라톤의 유래가 탄생
아테네의 유명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정부로,
일반적인 매춘부와 다르게 높은 교양 수준을 지니고
상류층들을 상대로 한 연회에서 시를 읊고 담론을 즐기던
'헤타이라이'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황진이 같은 고급기생 같은 부류로 생각하면 될 듯.
미모는 물론이고 지식과 언변도 출중했기 때문에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아테네의 유력가들을 사로잡았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당시의 수많은 지성들과 교류를 가졌었으며,
소크라테스는 그녀를 변증법과 수사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스승이라고 칭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여성이었다
아스파시아와 페리클레스
철학과 과학이 아테네보다 먼저 발전했던
소아시아의 도시국가 밀레토스가 페르시아에 압박에 짓눌리자
많은 사람이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로 망명했는데,
아스파시아도 그 틈에 끼여 혼자 피레우스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몇 년 지나기도 전에
이 소녀는 이혼남 페리클레스의 연인이 되어 공공장소에 나타났다.
외국인을 차별하는 법률 때문에 정식 혼인은 못했지만
펠로폰네소스전쟁 2년차에 남편이 전염병에 걸려 죽은 때까지
15년 동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난민 소녀가 최고 권력자의 아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스파시아는 똑똑하고 말도 잘했으며 당대의 지식인들과 널리 교류 했다.
아스파시아 말고는 소크라테스가 '덕이 있는 여자'라고 말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아스파시아를 가리켜 '첩년 또는 '밀레 토스 창녀'라고 했다.
아스파시아는 신성모독 혐의로 고발당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는데,
페리클레스가 법정에 나와 눈물로 호소한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감동적인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곤 했던 최고 권력자에게도
다른 방법으로 아내를 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도시국가 아테네가 인류에게 남겨준 가장 귀중한 유산은
플라카 에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말과 논리의 가치, 표현의 자유가 지닌 의미에 대한 각성이다.
공식적인 말의 성찬은
아고라와 프닉스 언덕의 민 회에 차려졌지만
그 모든 것을 준비한 곳은 플라카였다.
플라카가 없었다면 아고라와 프닉스 언덕도 존재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플라카에 구릉에 물을 끌어오고 나무를 심었다.
시장 후미진 구석에서 제단에 올릴 짐승들을 도축했고,
앞에서는 옷감과 향료와 노예를 사고 팔았다.
플라카는 또한 지식과 논리로
대중의 이성과 감정을 사로잡았던 소피스트의 활동무대였다.
소크라테스도 플라카의 번잡한 거리와 구둣방,
술집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인근 주택과 호텔, 상가, 식당, 술집이 늘어선 플라카의 골목에서
민주주의와 철학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소피스트가 논술 학원의 인기 강사였다면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소피스트와 달리 돈을 받지 않고 말했으며,
논증의 기술을 연마하기보다는 논리의 정합성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
자만심과 자아도취를 버리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살라고 했으며,
신의 가호가 아니라 이성의 힘에 의지해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말했다.
남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대중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았다.
다만 질문을 던져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대화가 진리를 찾 는 최선의 방법이라며 글을 일절 쓰지 않았다.
영토 확장 욕심에 불타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강국들의 연합 함대가
그리스 남쪽 해역에서 오스만제국 함대를 격파하자
그리스 독립군은 1833년 독일 바바리아의 귀족 오토를 내세워
그리스 왕국을 수립했다.
그들은 내심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탐냈지만
오스만제국의 수도를 빼앗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인구가 1만 명도 되지 않았던 아테네를 수도로 선포했다.
오늘의 아테네는 의도적 도시 설계의 산물이 아니라
능력 부족 으로 인한 부작위의 결과이다.
그리스왕국 설립자들은 국민국가의 수도를 설계할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아테네는 도로가 좁고 녹지 공간이 거의 없는 도시로 첫걸음을 뗐다.
첫 70년 동안은 인구가 크게 늘지 않아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몇 차례 인구가 폭 증했고
아테네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으며,
오늘의 아테네는 그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경로 의존적으로 형성되었다.
아테네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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