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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루스카이의 여기저기 자잘한 여행기
도서 감상

유럽도시기행Ⅰ(유시민) - 이스탄불편

by bluesky0321 2020. 5. 11.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전경으로 

오스만제국 시 건축된 것으로 터키의 대표적 세계문화유산이다.

모스크 안 벽면을 온통 뒤덮은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일명 블루모스크로 불린다.

 

인구 약 8천만이 조금 넘는 국가로써

주변에 여덟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불가리아, 그리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이라크, 시리아가 그것이다.

주요종교는 이슬람교이다.

 

책에서 주로 소개되는 여행지

 

 95%가 무슬림인 터키 국민은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하지만

더 개방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을 지닌 알레비파도 500만 명 정도 된다.

남들이 보면 다 똑같 은 무슬림이지만 그 사람들

스스로는 큰 차이가 있다고 여긴다.

무슬림이 아닌 극소수의 터키인과 외국인은 대부분 이스탄불에 산다.

 

인구를 기준으로 볼 경우,

이스탄불은 유럽 도시 중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도 5위권에 든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는 뉴욕, 베를린, 파리, 베이징보다 훨씬 깊고 넓다.

아시아 사이드인 아나톨리아 (Anatolia)에는

8천 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 호모 사피엔스가 살았으며

멸종된 호모 에렉투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유럽 사이드인 트라키아(Thracia)는 3천 년 전부터 인간이 거주했다.

전설에 따르면 B.C.7세기에 그리스 사람들이

유럽 사이드 '골든 온(Golden Horn)'이라는 만(灣)의 언덕에

처음으로 마을을 세웠다.

 

 

 

이스탄불,

단색에 가려진 무지개

 

역사가 무려 2천700년이나 되는

이스탄불의 최초 이름은 비잔티움(Byzantium)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영어로는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4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동로마제국(비자 제국)의 수도였으며,

그 다음 500년은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 었다.

 

오랜 세월 경제적·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이 도시는 20세기에 터키공화국의 영토가 된 후

국제도시의 면모를 거의 다 잃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역사와 문화는 실종되었고,

그 때 만든 몇몇 건축물만 박제당한 공룡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다.

 

터키공화국의 수도는

동쪽의 아시아 내륙에 있는 앙카라이지만

경제, 문화, 역사, 관광의 중심은 이스탄불이다.

 

 

비잔티움은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곳을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를 건국해 거대한 제국으로 키운

라틴족의 지배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리스 사람들은 동로마제국의 권력을 서서히 잠식한 끝에,

6세기에 들어서는 황실의 공용어까지도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꾸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전과 후를 구분하려고

'비잔틴제국'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 글에서는 비잔틴제국 과 콘스탄티노플을 기본으로 하되,

맥락상 꼭 필요할 때는 동로마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사용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수도답게

다양성과 관용의 정신을 구현한 국제도시로 발전했다.

기독교가 국교였지만

다른 종교와 민족과 언어를 박해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았으며

15세기에 이스탄불이 된 후 에도 그런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난해하고 불친절한 박물관, 

아야소피아

 

 

아야 소피아 또는 하기아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란 뜻이다.

터키의 동방정교회 대성당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537년부터 1453년까지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이후 다시 정교회 성당으로 복귀하였다.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1453년 5월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 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크며,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들은 미나레트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박물관이 아니었다.

이름만 박물관일 뿐 특별한 전시 전시품이 없었다.

나도 전시품이 아니라 아야소피아 그 자체를 보려고 갔다.

 

사실 아야소피아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이 도시가 콘스탄티노플이 된 이후 지금까지 겪었던 중대한 사건들을,

이곳에서 명멸했던 여러 문명의 영광과 수치를,

이스탄불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끌어안고 있다.

 

'카오스(혼돈)!' 아야소피아에서 이 말을 떠올렸다.

붉은 기운을 은은하게 내뿜는 아야소피아의 외관은

웬만한 궁전보다 화려했다.

 

원래 교회였다는데 주위를 이슬람 사원의 표식인

미나레(minare, 첨탑) 4개가 둘러싸고 있었다.

기둥을 바깥벽으로 밀어내어 만든

거대한 중앙 홀에서 돔 천장을 올려다보니

종교행사를 위해 만든 공간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야소피아 내부

 

아야소피아를 지은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그는 황국과 히포드롬사이의

빈터에 나무와 벽돌로 소박한 교회를 짓고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그리스어로 거룩한 지혜를 뜻한다.

아야소피아는 하기아 소피아의 오스만식 표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큰 정변이 날 때마다

부서지고 불타고 다시 지어졌다.

지금의 아야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7년에 완공했다.

대리석과 진흙 벽돌로 지은 이 집만큼 큰 교회는 그 전에 없었고,

그 후에도 천 년 동안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왜 이토록 화려하고 큰 교회를 지었을까?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아야소피아에는 블루 모스크와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 있다.

 

이 둘은 동로마제국의 타원형 공연장 히포드롬 자리에 들어섰다.

히포드롬은 로마의 콜로세오와 대전차 경기장을 섞어 놓은 공연장이었다.

콘스탄 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은 여기서

검투사 대결, 검투사와 맹수의 혈전, 이륜 전차 경기를 보았다.

 

그런데 신앙심 깊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잔혹한 검투 경기를 금지하고 전차 경기도 막아버렸다.

화난 시민들은 관리들의

심각한 부정부패 사건을 도화선 삼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523년 터진 이 사건을 '니카반란'이라고 한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당시 거주민의 15%인 

3만명이 죽었다.

 

 

아야소피아 자미의 종교적 정치적 지위는

500여 년 유지되다가 터키공화국의 무스타파 케말(아타튀르크)

대통령이 박물관으로 바꾸었을때 끝이 났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뒤에서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아야소피아의 비잔틴제국 시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1935년 개조 공사할 때 다시 빛을 보았다는 사실만 짚어둔다.

무스타파 케말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지금도 500년 전의 회칠 아래 잠자고 있을 것이다.

 

 

구시가의 아잔배틀

 

 

아야소피아와 경쟁하며 공존하는

블루 모스크는 잔디가 깔린 공원을 사이에 두고

아야소피아를 마주 보고 있다.

아야소피아는 비잔틴 제국의 아이콘 건축물이고,

블루 모스크는 오스만제국의 아이콘 건축물이다.

 

정식 이름은 1616년 사원을 완공한

14대 술탄의 이름을 딴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이지만,

2만 장의 외벽 청색 타일과 200개 넘는 푸른색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은은한 푸른색을 내뿜고 있어서 다들 블루모스크라고 한다.

 

 

아야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사이에 있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의 오벨리스크와 청동 뱀 기둥은

약탈 문화재를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개인적전 외침에 따라 곁눈질만 했다.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에서 만든 것이고,

원래 뱀 세 마리가 휘감고 있었던 청동 기둥은 그리스 사람들이

델피 신전에 세운 페르시아전쟁 전승기념비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오벨리스크에 씌웠던

청동 장식과 금박은 '돈 이 되는 것'이라 십자군이 떼어가 버렸다.

 

 

이스탄불에는 약탈 문화재가 많지만,

압권은 '지하궁전'이다.

아야소피아 앞 공원 오른쪽 블록 모퉁이에 입구가 있는

'지하궁전'은 궁전이 아니라 지하 저수조다.

터키어 '예레바탄 사라이'를 직역한 '지하궁전' 보다

'바실리카 시스턴(Basilica Cistern, 대성당 저수조)'이라는 영어 이름이

훨씬 정확하게 이 공간의 기능과 성격을 알려준다. 

 

 

 

 비잔틴제국은

20킬로미터 떨어진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와 수조를 채웠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메드 2세는 고인 물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수조를 모두 폐쇄해 버렸다.

 

그런 저수조가 이스탄불 관광의 핫 플레이스로 변신한 것은

우연히 발견된 '메두사'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 진흙과 폐기물을 걷어내는 복원사업을 하던 중

안쪽 모퉁이에서 메두사를 부조한 돌덩이가 2개 나왔는데

하나는 옆으로, 다른 하나는 거꾸로 놓여 있었다.

 

메두사는 머리카락이 뱀 모양이고,

눈이 마주치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그리스 신화의 괴물이다.

 

지하궁전에는 300개 넘는 돌기둥이 잘 훈련받은 군인들처럼

오와 열을 반듯하게 맞추어 천장을 받치고 있다.

국제 규격 축구장보다 큰 지하 공간의 이동로를 걸으며

조명등 빛이 천장과 돌기둥과 수면에 일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세상이 아닌 곳에 온 것 같았다.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촬영을 하고 싶었을테고,

전시 기획 전문가라면 딱 맞는 이벤트를 생각해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서 실제로 영화를 찍기도 하고

이스탄불 예술 비엔날레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니,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 보다 

 

 

 

젊은 황제의 호연지기,

토프카프 궁전

 

 

토프카프는 '포문(砲門)'이라는 뜻으로,

궁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건물들은 단순하고 투박한 사각형이었고 정원 역시 화려함이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이스탄불에서 본 모든 건축물 중에서 나는 이곳이 제일 좋았다.

그 집을 지은 사람의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프카프 궁전은 걸출한 건축가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술탄 메메트 2세가

거처와 관청으로 쓰려고 지은 여러 건축물과 생활 공간의 집합이다.

 

 

 

 

 

메메트 2세는

단순하지만 위력적인 전법을 썼다.

전함을 땅에 올려 쇠사슬을 묶은 지점을 우회한 다음

다시 바다에 띄워 홑겹 성벽에 접근한 것이다.

 

적군이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접근하자 콘스탄티노플 수비대는

허겁지겁 골든 혼 성벽으로 병력을 분산했고,

오스만투르크의 육군은 대포의 화력에 집중해 서쪽 내륙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돌파했다.

 

1453년 5월 29일 아침이었다.

16만 대군의 포위 공격을 두 달 동안 막아냈던 7천 명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대는 거의 다 전사했고

비잔틴제국은 해체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 는 비보를 접수한

유럽 기독교 세계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테오 도시우스 성벽은 그날 무너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의 여세를 몰아

흑해에서 이어지는 동유럽,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의 해안 지역,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반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이때 '유럽의 화약고'로 자라날 참극의 씨앗이

발칸반도에 뿌려졌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세상사를 보는 관점도 달라지는 법.

1453년 5월 29일 아침 벌어졌던 사건을 가리켜

유럽 기독교인들은 '콘스탄 티노플 함락'이라 했고,

세계의 무슬림들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이라 했다.

 

둘 다 일리가 있다.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고,

콘스탄티노플은 그에게 함락되었으니까.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바꾸었지만,

도시가 사라지거나 몰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은 투르크족만의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민족,

상이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 제국이 되었고

이스탄불은 그런 제국의 수도다운 도시로 발전했다.

 

 

 

아타튀르크

이스탄불의 터키화

 

외국계 주민들이 이스탄불을 떠난 경위를 살피다 보면,

'아타튀르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내가 돌마바흐체 궁전 간 것도

술탄들의 허세를 구경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타튀르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궁전의 주인은 건축주 술탄이 아니라 아타튀르크이다.

예외 없이 9시 5분을 가리키며 멈춰 서 있는 시계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아타튀르크가 옛 술탄의 침실에서 마지막 숨을 내쉰 시각이 오전 9시 5분이었다.

 

어떤 사람이었다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이스탄불의

역사에 비잔타스, 콘스탄티누스 황제, 술탄 메메트 2 세만큼이나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타튀르크를 모르면 오늘의 이스탄불을 이해할 수 없다.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손잡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영국에 넘겨주고

모로코, 튀니지, 시리아와 터키 남동부 지역을 프랑스에 내주었으며,

에게해의 섬 대 부분과 에게해 연안 도시들을 그리스에 빼앗겼다.

수도 이스탄불마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연합군이 장악했다.

 

 

아타튀르크는

1880 년대 무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성(姓)이 없었던 그 당시 백성답게

흔하디흔한 '무스타파'를 이름으로 받았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 무스타파는 고향의 군사 예비학교에 

선생님한테 '케말'이라는 새 이름을 받아 '무스타파 케말'이 되었다.

 

1902년 이스탄불 사관학교 보병대를 졸업하고

1905년 시리아에서 근무할 때 비밀 정치 조직에 가입했다.

 

오스만제국은 패배했지만

다르다넬스해협의 차낙칼레에서 연합 공세를 막아낸

무스타파 케말은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전쟁이 끝나 직후 그는 오스만제국 장군 계급장을 버리고

정치와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연합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상황에서

터키의 민족주의 정치결사였던 대국민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021년에는 앙카라에서 터키공화국 헌법을 선포하고

터키군 사령관자리를 맡았다.

 

무스타파 케말은 그리스를 물리쳐 에게해 연안의 영토를 되찾았고

아르메니아가 차지하고 있던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 탈환했으며,

소련과 평화조약을 맺고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체결

터키공화국을 국제사회에 데뷔시켰다.

 

터키공화국은 1923년 7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과

로잔 평화조약을 체결해 국제사 회의 승인을 받았으며,

연합국 군대가 이스탄불을 떠난 직후 무스타 파 케말은 터키공화국의

첫 대통령에 취임했다.

 

 

 

 

내키는 대로 다닌 이스탄불

 

토프카프 궁전, 아야소피아, 블루 모스크,

갈라타 다리, 에미니 선착장, 해협 유람선,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리, 위스퀴다르 , 탁심 광장, 이스타클랄 거리, 갈라타 타워.

이스탄불 관광 안내서나 키지 투어 가이드가 권하는 곳을 다 가는데

이틀 반을 썼다.

 

나머지 하루 반은 눈길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주로 트램과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오스만제국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도자기, 카펫이 대단하다는

소문에 홀려 토프카프 궁전 초입 왼편에 있는 카펫 박물관을 찾았다.

 

제1관에는 13~18세기의 소위 '아나톨리안 카펫'을 전시해 두었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밝은 조명이 카펫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오스만제국 초기의 카펫은 꽃무늬, 후기 카펫 은 아라베스크 문양이 대세였다.

 

제2관에는 모티브가 뚜렷한 카펫을 모아두었는데

귀걸이는 결혼의 꿈, 새는 지혜 행복 사랑, 양의 뿔은 힘과 용기와 풍요,

중국풍 구름은 황제의 권위와 품격을 표현했다고 한다.

 

 

터키 커피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외국인이 붐비는 카페에서 마셨던 터키 커피는 '터키식 커피'가 아니었다.

그냥 터키에서 파는 커피였을 뿐이다.

 

이곳에서 '터키식 커피'를 어떻게 끓이는지 관찰했다.

입구에 숯불을 담은 화덕이 있었다.

아기 분유보다 고베 간 원두를 물이 든 주전자에 넣고 화덕에 올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동합금으로 만든 주전자 같았다.

 

주전자를 화덕 위에서 올렸다 내렸다 하며 거품을 가라앉혔다.

8리라짜리 '터키식 커피 더블'을 주문 했더니

도자기 잔에 담아주었는데, 양이 싱글의 세 배는 되어 보였다.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유리잔에 담은 생수가 따라 나왔다.

가루를 물에 넣고 주전자에 끓였으니

'터키식 커피에는 커피 분 말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가루가 다 내려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마셨는데도

미세한 분말이 혀를 간지럽혔다.

아주 살짝 단맛이 나는 것으로 보아 끓일 때 미량의 설탕을 넣지 않나 싶었다.

다 마시고 나니 진흙처럼 가라앉은

커피 가루가 잔의 1/3 정도를 채우고 있었다.

 

그 커피는 다른 데서 마셨던 것보다 향이 좋았고

맑은 맛이 났다.

혀에 커피 분말이 느껴지는데도 느낌이 깔끔했다. 

 

 

 

터키 이스탄불 여행이 끝나고 

파리 편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