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Colosseum)은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라고 한다.
서기 72년에 착공하여 8년만에 완공한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이다.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며,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황제의 동상(巨像:colossus)에서 유래한다.
뜻밖의 발견을 허락하는 도시
로마
인구 6천만명 정도
이탈리아에는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를 비롯해
사람의 마음을 끄는 도시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로마를 온전히 대신할 만한 도시는 없다.
로마는 무엇이 특별한가?
우선 예술적 기술적 수준이 높고 규모가 큰 고대 유적이
유럽의 어떤 도시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많다.
둘째, 세상에 하나뿐인 바티칸 교황청 덕분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품고 있다.
셋째, 19세기 후반 출현한
이탈리아 국가 수립의 역사를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서구 문명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빅뱅'을 일으켰고
로마제국에서 '가속 팽창'을 했다.
로마는 서구 문명의 가속 팽창 흔적을 지닌 도시답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문명의 발전 양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단 한 번 여행으로 로마의 모든 것을 보겠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갖지 않는 것이 좋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황제의 시선으로
2천년 전 황제는
이런 복합단지를 내려다보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제국을 다스렸다.
로마군단은 잔혹한 정복전쟁의 전리품과 포로을 앞세우고
개선문을 지나 황궁 아래 큰길을 행진했다.
공화정 시대 정치인들은 포로 로마노에서 연설했고,
시민들은 신전에 제물을 바치며 행운과 복을 빌었다.
휴일에는 수만 명이 대전차 경기장과 콜로세오 객석에서
미친 듯 환호성을 질렀다.
그곳에서 시민들은 중요한 정치·사회적 변화에 관한 정보를 얻고
소문을 퍼뜨렸으며, 귀족들은 어둠이 내린 대저택에서 토할 때까지
산해진미를 먹거나 황제를 암살하기 위한 책략을 꾸몄다.
황제와 귀족과 시민들이 그렇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수고는 전쟁포로로 잡혀 오거나 빚에 눌려 노예가 된
사람들이 처리했다.
고대 로마는 그런 도시였다.
과시욕의 아이콘, 콜로세오와 개선문
돌과 콘크리트로 지은
로마제국 최대의 공공 건축물 콜로세오는
황제의 권력만이 아니라 제국의 힘과 당대의 건축기술을
집약해 보여준다.
콜로세오 이전의 공연장은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이나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처럼 경사진 터에
객석을 설치한 반원형 야외 극장이었다.
콜로세오는 그런 극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반원형 극장 둘을 맞붙인 게 아니라
3층 객석이 있는 타원형 건물을 평지에 세웠다.
엄청난 비용과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 들어갔다.
로마의 건축 기술자들은 중력을 이용해 중력에 맞섰다.
콜로세오의 외부 경계선을 따라 땅을 깊이 파고
거대한 돌덩이를 심은 다음 그 위에 벽돌을 쌓는 방식으로
공연장 외벽을 올렸다.
아치형벽을 3단으로 쌓아 벽돌의 하중을 분산하고
기둥은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식으로 층마다 다르게 멋을 냈다.
수만 명의 관중이 짧은 시간에 드나들 수 있도록
관중석 계단 사이에 방사형 통로를 만들었다.
통로와 천장은 자갈과 석회석을 혼합한 콘크리트를 썼고,
바깥벽 꼭대기에 설치한 나무 기둥에 천막을 늘어뜨려
태양을 가렸다.
티투스 개선문
서기 79년에 제위에 올랐던
티투스 황제는 성격이 온화하고 정적에게 관대했으며,
여론을 존중했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4년 밖에 되지 않았던 재위기간 내내 끝도 없이 찾아온
재난과 싸우다 지치고 병들어 죽었다.
즉위 직후 베수비오 화산이 터져 폼페이 일대가 통째로 파묻혔고,
다음해 로마에 큰 불이 났으며,
곧이어 들이닥친 페스트의 확산을 막는 한편 불
타버린 로마를 재건하는 와중에 네로의 황궁 연못자리에 콜로세오까지 지었으니,
로마제국 최강의 토건 황제라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콜로세오는 로마 정치체제 변화의 결과이며 상징이었다.
공화정시대에 시민들은 포로 로마노에서
정치인들의 격정적이며 자신을 대표할 공직자를 선출하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민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제정시대에는
모든 것을 황제와 소수의 권력자에게 콜로세오의 잔혹한 검투를 보며
미친듯이 소리지르다가 패배한 검투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인지 여부를 두고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관객으로 살았다.
정치체제의 변화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콜로세오와는 별 관계가 없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멀쩡한 상태로 남은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성 덕분이었으리라.
4세기 초 여러 공동 황제와 부황제의 대립과
다툼으로 정치적 혼돈에 빠져 있던 로마를 힘으로 평정하고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했던 그는 로마제국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였다.
개선문 주변에 기관단총을 든 군인들과 무장 차량이 있었다.
물론 개선문 경호가 목적은 아니다.
유럽 여러 곳에서 끔찍한 살상행위를 저지른
극단주의 이슬람 무장단체 IS(Islamic State)의 테러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그들 덕분에 집시와 소매치기에 대한 이야기가 헛소문으로
느껴질 만큼 콜로세오 일대는 질서정연했다.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카이사르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는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거의 없다.
그나마 그가 잠시라도 머물렀을 원로원 건물이 보이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카이사르는 B.C.1세기 중반 아주 잠깐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을 뿐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 정에서 제정으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제국의 황제 또는 절대 권력자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캐사르, 카이저, 시저, 차르 등은 표기법과 발음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 카이사르에서 나온 말이다.
로마신화가 그리스신화의 복제품인데서 알 수 있듯이
로마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정치체제도 그랬다.
왕정에서 시작하여 B.C.6세기에 공화정으로 바뀌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즉위한 B.C.27년 제정으로 넘어갔다.
판테온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이란 뜻
판테온의 원형 홀에 서자
시선이 저절로 콘크리트 돔 천장 가운데 빛이 들어오는 큰 구멍으로 갔다.
빛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데워진 공기가 나가고
비와 눈도 떨어진다는 구멍이었다.
조각상과 그림이 있는 벽 쪽은
어두워서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미리 찾아본 정보들이 맞는미리 찾아본 정보들이 맞는지 가늠해보았다.
천장 돔의 두께가 위로 갈수록 얇아진다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홀의 지름과 바닥에서 돔 중심까지의 높이는 비슷해 보였다.
그 둘이 같다면 천장 돔의 테두리를 따라 그린 가상의 원이
홀 바닥 중앙에 닿을 수밖에 없다.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면
판테온은 지름이 약 43미터인 공의 아래 절반을 지름이 같은
원통에 담은 형상이었다.
4천500톤이 넘는 돔의 압력이 한가운데 구멍의 테두리 돌에서
맞물려 균형을 이루고, 전체의 하중은 원통형 벽을 따라 세운 기둥들이
지탱한다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다.
콘크리트는 석회 반죽에 가벼운 화산암을 섞어 만들었다는데,
겉보기로는 오늘날의 콘크리트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베네치아 광장과 캄피돌리오 광장
미켈란젤로는
타원형의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여
로마의 중심부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광장 중앙에는 옛 로마 황제의 기마상이 놓여 있고
기마상 밑의 바닥에는 12개의 꼭짓점을 지닌 별 모양의 장식이 있다.
광장의 바닥은 기마상에서 뻗어 나온 선들이 교차하여 만들어진
문양으로 잘게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광장의 구성은
기하학적 도형들이 대칭적으로 조합되어 정제된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다.
광장의 타원형은
고대 그리스 신전에 놓여 있었던 신성한 돌인 옴팔로스의 형태를 본뜬 것이라 한다.
옴팔로스는 형태가 달걀형이고 그 표면은 여러 선들이 교차하여 만들어진
독특한 다각형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옴팔로스는 ‘배꼽’을 가리키는 말로 인체의 중심,
나아가 ‘세계의 중심’을 뜻한다.
캄피돌리오 광장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복제품)
박물관에 전시중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진품)
트레비 분수
스페인광장
스페인 대사관이 있어 스페인 광장이라 불린다.
포폴로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의 상징으로 세웠던 돌기둥 형태의 기념비)는
B.C.13세기에 만든 것으로 높이가 36m나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와 대전차 경기장에 세워두었던 것을
16세기 후반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집트에는 오벨리스크가 대체 얼마나 많았기에
한때 힘을 썼던 유럽의 도시에는 어디나 있는지 궁금해서 검색해봤지만
정확한 통계를 찾지 못했다.
오벨리스크가 있는 광장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무거워진다.
왼쪽의 바티칸시국과 콜로세오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중간지점에 테레비 분수가 있다
바티칸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곳이다.
로마에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교황이 다스리는 별도의 도시국가인데,
이 특이한 국가의 영토는 겨우 0 44제곱킬로미터이고,
1천 명이 겨우 넘는 시민권자의 직업은 성직자, 직원, 근위병이 전부다.
바티칸이라는 지명은 가톨릭 교황청보다 먼저 생겼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는 바티칸 언덕에서 베드로 광장까지다.
이 구역은 9세기 중반 교황 레오 4세가 사라센족의 공격을 막으려고
강둑을 따라 성벽을 쌓아 올리면서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이탈리아왕국은
1871년 교황청의 주권을 전면 부정하고 바티칸을 로마에 통합했지만,
1929년 무솔리니가 라테라노에서 조약을 체결해
현재의 바티칸 지역을 교황청의 영토로 인정했다.
바티칸 대성당 내부
성베드로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바티칸 미술관의
첫손꼽는 인기스타는 시스티나 예배당이었다.
천장에는 미켈란젤로가 4년 동안
척추가 휘고 시력이 악화하는 고 통을 감수하며
그렸다는 〈천지창조>가,
그 아래에는 교황청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워서 그린 최후의 심판이 있다.
다 그린 후에 그림을 본 교황청 사람들은
등장인물이 모두 벗고 있다는 데 격분했고,
끝내 다른 화가를 동원해 가리개를 덧그렸다.
바티칸에서는 조각상도 다들 신체의 한 부위에 가리개를 하고 있었다.
성기의 노출을 금기로 여기는 것이 기독교 교리 때문인지
교황청 인사들의 집단적 미의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음란함'을 포착해 낸
그들의 안목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대성당의 최고 스타는
단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이었고,
이것을 보려면 사람이 제일 많은 데로 가면 된다.
대성당 한가운 데 놓인 제대, 제대의 청동 장식,
대리석으로 만든 일곱 계단, 상아로 마드 (성 베드로의 의자),
천연 대리석으로 깎아 비둘기와 천사 형상을 그려낸 타원형 창문,
제단 아래 지하에 있는 역대 교황의 관, 성베 드로 대성당의 모든 것들이
권력의 광휘를 내뿜었다.
대성당은, 적어도 내게는,
신의 숨결이나 예수의 고뇌를 감지하기에 적합한 공간이 아니었다.
피오리광장의 조르다노 브루노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 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팍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어때? 종종 만나서 놀면 괜찮지 않겠어?”
로마가 물었다.
테르미니역 승강장에서 공항 가는 기차에 오르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가끔 만나는 건 뭐, 나쁠 것 없겠지.
다음에 보자.
바쁜 일 좀 끝나면.. 차오(Ciao, 안녕)!”
로마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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