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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중국편2,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1)

by bluesky0321 2019. 10. 6.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중국편2

막고굴에 대한 이야기





막고굴에 대한 몇 가지 물음

 내가 막고굴에 대해서 일찍부터 갖고 있던 몇가지 근원적인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여기에도 없었다.

그중 첫 번째는 무엇 때문 에 이 많은 석굴사원이 경쟁적으로 굴착되었는가,

몇 개만 있으면 그 만 아닌가,


그리고 누가 자금을 대서 그 경비를 감당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단순히 예불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많을 이유도 없고

석굴 안을 빈틈없이 벽화로 채울 이유도 없다.



두 번째 물음은 492개의 석굴의 제작 시기를 어떻게 알고 북주시대,

성당시대의 것이라 단정적으로 말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돈황연구원장을 지낸 번금시(樊錦詩)가 펴낸 『돈황석굴(敦煌石窟)』

(돈황연구 원 2008)에 부록으로 실린 연보를 보니

현재 돈황 막고굴 중 확실한 제 작연대가 밝혀진 석굴은 9곳밖에 없다.



세 번째 물음은 토목공학적으로

이 석굴이 어떻게 그렇게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어디 에도 없고 무슨 양식이라는 설명뿐이다.




또 하나의 예로 미국 예일피바디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우리나라 민속품의 내력을 들 수 있다.





1946년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측 대표단 중에는

문정관으로 참여한 코닐리어스 오스굿(Cornelius

Osgood)이라는 민속학자가 있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협정단에 민속학자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무서운 얘기 지만

그는 이때 강화도에 있는 어느 중류층 가정집의 모든 가구와 집 기 전체를 구입하여

예일피바디 자연사박물관으로 가져갔다.


밥상, 부 지깽이, 멍석부터 요강까지 말이다.

그들은 이미 이를 모두 유리 원판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있는데

마치 75년 전 우리 농가의 생활상을 말해주는 타임머신 같다.


학자들은 학문적 성과와 편의를 위해 제국주 의자들이 베푸는 지원을 기꺼이 받았고,

또 요청했다.

그런 물적 지원 아래 자신의 학문에 전념하며 열정을 바칠 수 있었다.

한반도는 물론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의 민속과 무속을 조사한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뛰어난 업적 역시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