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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루스카이의 여기저기 자잘한 여행기
도서 감상

유럽도시기행Ⅰ(유시민) - 파리편

by bluesky0321 2020. 5. 12.

에펠 탑 전경

 

파리,

인류 문명의 최전선

 

인구 7천만이 좀 되지 않는

유럽에서 세번째로 큰 나라

 

유작가의 여행코스

이 동선을 따라 여행해보는 것도 좋을 듯

 

파리를 지구촌의 문화도시로 선정해야

하는 이유는?

 

프랑스의 인구는 7천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데,

북아프리카의 옛 식민지 이주민을 비롯한

'비(非)백인'이 15%나 된다.

 

로마 가털릭 신자가 국민의 70%를 넘지만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고 한다.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유럽연합 창설을 주도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18년 기준으로 세계 20위인 4만 5천 달러 수준이다.

 

군사력도 만만치 않다.

핵발전으로 에너지 소비량의 30%를 생산하는 만큼

세계 최고의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기술을 가진 핵 강국으로 비추천 핵폭탄이

미국과 러시아 다음으로 많다.

 

자동차, 화학, 제약, 기계, 전기, 전자 등 제조업과

식품, 패션 산업의 경쟁력이 높지만 국내 일자리의 60퍼센트는 관광, 사회복지,

금융, 항공, 운수 등 서비스업에 있으며,

소수의 거대기업이 아니라 수많은 작고 강한 중소기업이

산업을 주도한다.

 

 

이른바 '백년전쟁'으로 급진적인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 후,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갔고,

파리는 대혁명의 지 진앙이 되어 문명사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오늘의 파리는 그 혁명을 거치면서 시민의 도시,

공화국의 수도로 거듭났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불붙은 백년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대를 이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중세 유럽에서 흔하디흔했던 왕들의 다툼에서 출발했지만,

잔 다르크의 등장을 계기로 국민의 전쟁이 되었다.

대천사 미카엘과 '알렉산드 리아의 성녀 카테리나'를 만났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에 뛰어든 열일 곱 살 시골 소녀 잔 다르크는

1429년의 오를레앙 전투를 비롯해 여러 중요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잉글랜드 왕의 야심을 무너뜨렸다.

 

잉글랜드군에게 사로잡혀 혹독한 마녀재판을 받은 후

장작불 위에서 불타 죽음으로써 프랑스의 민족 영웅이 되었다.

샤를 7세가 잔 다 르크의 후광을 받으며 전쟁을 끝냈을 때,

프랑스 국민은 예전과 달리 강력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로트르담 대성당

 

2019년 대성당 화재모습

 

첨탐과 지붕을 재건하자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있다.

 

시테섬에 있는 파리 대주교좌 성당의 이름 '노트르담'은

이탈리아가 너나없이 이름 첫머리에 붙이고 있는

'산타마리아'와 비슷한 뜻이다.

 

파리 주교와 로마 교황청이 12세기 중반부터

200여 년 동안 건물과 첨탑을 올리고 파이프오르간과 성가석을 포함한

내부시설을 지었다.

폭 48미터, 길이 130미터, 천장 높이 35미터의 고딕양식인

이 성당의 건축학적 특징은 따로 말하지 않겠다.

아야소파아 성당이나 성베드로 성당에 비교하면

노트르담은 평범하고 소박하다.

 

노트르담은 종교시설인 동시에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갈등이나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6세기 위그노전쟁 때는 개신교도들이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지목하여 파괴했다.

루이 15세가 개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혁명 때 또 부서졌다.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을 하면서 조금 손을 보았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폐허를 방불케 하는 흉물로 퇴락해 19세기에는 철거 여부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마저 벌어졌다.

 

가 빅토르 위고가 존폐의 기로에 선 노트르담을 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틀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1831)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시민들은 노트르담 복원 기금 조성 캠페인을 벌여 성당을

완전하게 복원했다.

 

 

 

샤를마뉴 기마상

대성당 광장에 서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 마당의 샤를마뉴 대제의 청동 기마상에

눈길을 주는 관광객은 없었다.

우측면에 기도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조각상도 그랬다.

이 청동상과 조각상은 노트르담의 종교와 정치권력 중심'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들 성당의 위만 바라보았다.

 

성당 전면 '장미의 창'이나 독일군의 폭격에 부서질까 봐

떼서 숨겨 두었다는 스테인드글라스도 인기가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교수대에서 구출해

어들었던 공간을 탐색하는 중이라고 나는 내 마음대로 짐작해 보았다.

 

문학의 힘이 총칼보다 센지는 모르겠으나 더 오래 지속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2019년 4월, 노트르담의 첨탑과 지붕이 불에 타 무너졌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파리 시민들,

장미의 창을 비롯한노트르담의 귀중품을 구해내려고 분투하는

소방관과 시민들의 몸부림이 화염이 첨탑을 집어삼키는 장면보다

더 강한 여운을 남겼다.

 

과 며칠 만에 우리나라 돈으로 1조 원이 넘는 복구 성금이 모였다는

뉴스는 이런 의문을 일으켰다.

'노트르담이 도대체 뭐기에?'

 

 

 

루브르 박물관

 

예술작품을 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한계효용 체감 법직'은 루브르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끝도 없이 나타나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예술작품을 보고 있자니 점차 그게 그것같은 생각이 든다.

 

게다가 다빈치의 〈모나리자〉,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

애그로의 오달리스크처럼 유명한 그림 앞에는 사람이 말 그대로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팔꿈치로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 가까이 갈 수는 있지만,

남들도 팔꿈치를 세우기 때문에 차분하게 감상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뚝 떨어진 곳에서 까치발을 하고 다른 사람들 머리 위로 보면,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오버 투어리즘'은 베네치아나 만리장성에서 생긴 현상이 아니다.

루브르에 서는 수십 년 전에도 그랬다.

 

 

 

카루젤 개선문

 

 

 

튈르리 정원

 

튈르리정원은

앙리 2세의 왕비였던 피렌체 메디치 집안의 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16세기 중반에 만든 궁전의 뜰이었다.

 

카트린 왕비는 머리가 좋은데가 충분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알았고 천문학과 수학에도 밝았다.

 

남편이 다른 여자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동안

카트린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으면서 외로움을 견뎠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아들 셋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말로 왕비를 위로했는데

그 예언대로 앙리 2세가 말에서 떨어져 죽은 후 아들 셋이 차례로 왕이 되어

 카트린은 30여 년 동안 섭정하며 국정을 좌우했다.

그러나 남편과 세 아들을 먼저 보냈으니 행복한 인생이었을 리는 없다.

 

카트린 왕비는 변변한 식사 예법도 없었던

프랑스 왕실에 피레 체 부잣집의 고급 요리와 디저트를 들여왔고,

강변에 튈르리 궁전을 지어 전망 좋은 테라스를 귀족들의 놀이터로 제공했다.

 

 

 

콩코드광장

 

 

엘리제 궁전

 

엘리제 궁전은 1722년 완공했는데,

그때 루이 15세가 열두 살이었으니 그가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공식 정부(情婦)' 마담 퐁 파두르에게

파리의 최고 품격 건물로 평가받던 엘리제 궁전을 선물로 주었다.

 

분개한 시민들이 매춘부의 집'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1 인 시위'를 벌였다는 그 궁전을 대통령 관저로 쓰고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프랑스 사람들, 대단하군!'

 

엘리제 궁전은 1722년 완공했는데,

그때 루이 15세가 열두 살이었으니 그가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공식 정부(情婦)' 마담 퐁 파두르에게

파리의 최고 품격 건물로 평가받던 엘리제 궁전을 선물로 주었다.

 

분개한 시민들이 매춘부의 집'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1 인 시위'를 벌였다는 그 궁전을 대통령 관저로 쓰고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프랑스 사람들, 대단하군!'

 

 

 

 

에뚜알 개선문

 

에투알 개선문은 높이 50미터 폭 45미터 정도 되는

개선문 외관을 살펴보았다.

 

1806년 시작했던 건축공사가 러시아 원정참패로 중단된 탓에,

이 개선문은 나폴레옹 사후 15년이 되던 1836 년에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에투알 개선문은 나폴레옹 개인만이 아니라

대혁명과 프랑스 현대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나폴레옹의 여러 전승 장면이나 병사 그것과 함께

대혁명 직후 영웅적 전투를 수행한 마르소 장군과 최초의 공화정을 세운

1792년 시민군의 모습도 부조해 놓았다.

 

꽃과 파르라니 타오르는 불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를 추모한다.

 

시테섬에서 루브르를 거쳐 개선문까지, 파리의 중심지는

왕실과 그의 권력과 부를 표현하는 공간이었다.

대혁명은 정치제도를 변혁했을 뿐만 아니라 왕의 권력 공간도 자유와

다양성이 넘치는 시민생활 공간으로 바꾸었다.

 

개선문 전망대에 오르면 드골 광장의 이름이

왜 에투알(toile, 별) 광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샹젤리제 거리를 포함한 길 12개가 광장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드골 광장이라니?

별마당이 훨씬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이름 아닌가!’

광장 이름을 잘못 바꾸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을 생각해보기에 적절한 곳이다.

 

 

 

 

베르샤유궁전

 

 

 

 

 

 

 

 

베르샤유궁전 거울의 방

 

내가 제일 눈여겨본 곳은 궁전의 서쪽 회랑 전체를 차지하는

'거울의 방' 또는 '유리의 방'이다.

길이가 70미터 넘는 이 창문 17개와 거울 578개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 세어 않았다.

 

여기서는 뒤편 십자형 인공 호수(또는 운하)와 좌우 정원,

원래의 1/10밖에 남지 않았다는 숲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실내에 있는 물건 중에서 관람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황금 촛대라고 한다.

 

베블런이 주로 정치, 전쟁, 종교 분야에 활동한다고 한

유한계급은 베르사유 궁전의 수많은 방 가운데 이곳을 제일 좋아했다.

이 방을 차지했다는 것은 곧 베르사유 궁전과 프랑스를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프로인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71년 이 방에서 독일제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대표들이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한 장소도 이 방이었다.

사족이지만 그때 서명한 조약에 샴페인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한 스파클링 와인에만 '샴페인' 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굳이 이렇게 한 것은 혹시 맛으로는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에펠탑

 

20세기 이후의 파리를 만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에펠탑과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에펠탑은 단순한 랜드 마크 1번 건축물이 아니라

파리가 사피엔스의 문화수도가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대표 건축물은 파르테논이고,

로마의 대표 건축물은 콜로세오다.

이스탄불은 하기아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가 경합한다.

 

 

에펠탑은 에투알 개선문 맞은편 센강 좌안의 마르스 광장에 있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세계박람회의 관문으로

쓰기 위해 만든 324미터 높이의 이 철골 구조물은 1889년 완공했지만

20세기의 건축물로 보는 게 적절하다.

 

디자인을 한 구스타브 에펠의 이름이 붙은

이 철탑은 아름답다기보다는 독특하다.

 

이것 덕분에 파리를 지구촌의 문화수도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이야기해보겠다.

 

 

 

오르세미술관

 

 

집 자체도 예술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오르세 미술관은 철도회사가 1900년 세계박람회를 맞아 지었던

역사(驛舍)와 호텔 건물이었다.

 

그런데 승강장을 너무 짧게 만든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역으로 쓸 수 없게 되었고, 호텔도 영업이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시 당국은 수십 년 동안 논의한 끝에 미술관으로 개조했고,

미술관은 1986년 문을 열자 단박에 파리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오르세 미술관은 시간 여행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찍는 세트장 같았다.

관람객들이 옛 역사의 커다란 벽시계를 뒤에 두고 인증샷을 찍는 것은

그런 느낌 때문일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은 그리 크지 않고

전시품도 많지 않아서 한 시간 정도에 둘러볼 수 있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뭉크, 고갱, 고흐, 앵그르 등 학창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작품들이 눈앞에 걸려 있 었다.

 

인상파를 태동시킨 19세기 후반의 사진은 덤으로 구경했다.

파리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여행지여서 루브르와 베르사유 궁전뿐만 아니라

오르세 미술관도 한국어 오디오가이드를 갖추고 있었다.

플래시만 터뜨리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구스타브 쿠르제의

세상의 기원

 

 

 

 

 

파리편 끝.

 

이로써 유시민 작가의 유럽도시기행 1편을 모두 살펴보았다.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중에서

아테네와 로마는 들러본 적이 있어 매우 반갑고 낯익다.

 

그러나 이스탄불과 파리도

마치 내가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 여행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산 덕분이리라...

 

곧 이스탄불과 파리에도 갈 것 같다.

 

유시민의 유럽도시기행 1편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