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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루스카이의 여기저기 자잘한 여행기
다녀온 그 곳

킬링필드 현장을 가다 -- 캄보디아

by bluesky0321 2013. 3. 9.

 

캄보디아 시아누크 왕이 작년 11월 서거했다.

장례는 2013년 2월에 거행되었다고 한다.

캄보디아는 현재 입헌군주제로 국왕이 정부수반이나

1970년 쿠데타로 크메르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1975년 크메르 루즈에 의해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어 민주 캄푸치아로 국명이 변경되었다.

이후 1993년에 캄보디아로 국명을 바꾸었다.

 

시아누크 국왕은

킬링필드로 잘 알려진 캄보디아의 내전 시 국외로 망명하였다가

1993년 다시 돌아와 국왕의 자리에 앉았다.

시아누크는 2004년 왕위에서 물러나고 아들인 시하모니가

왕위를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3년 2월

프놈펜 수도에는 시아누크 영정이 시내 곳곳에 비치되어 있다.

특히 왕궁 주변을 비롯해 독립기념탑으로 이어지는 공원 및

도로 주변에 많은 영정들이 국민들의 애도를 받고 있었다.

 

캄보디아 왕국의 왕궁모습

 

정면에 시아누크 국왕의 영정이 걸려있다

 

시아누크 국왕은 재일시절은 물론

양위 뒤에도 국민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정권의 실질적인 행정부의 권리는 총리에게 있지만

총리는 국왕이 국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한다.

 

시아누크 국왕의 즉위식 당시의 사진이다.

 

재임시절의 사진

왕궁 앞 광장에 위업을 설명한 자료들이 있다.

 

캄보디아는 내전과 베트남의 침략을 받았다.

1993년 내전이 종식되고 독립기념탑을 세웠다.

 

사진의 고급빌라 들 한 가운데 북한의 대사관이 있다.

위치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좋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아

캄보디아와 북한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국왕의 장레가 치러진 사원

 

내부로 들어가자 밤 늦은 시간에도

많은 조문객과 관광객들로 붑비고 있다.

 

화려하게 장식한 사원의 모습이

낮과는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캄보디아하면

킬링필드와 앙코르 와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현재 캄보디아의 대부분 수입은 앙코르와트의 관광수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앙코르와트는 너무나 유명하여

이제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더물 정도이다.

 

호치민에 있는 킬링필드 당시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학교에 가 본다.

인구 7백만 중에 2백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당시

이곳은 학교를 개조해 만든 정치범 수용소이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은 모두 죽어서 나갔다고 한다.

아래는 이곳에서의 행동지침

 

당시 고등학교를 개조해 수용소로 만들었다

각 층이 고문실과 감금실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 흰 관은 당시 최후에

숨이 붙어 있던 사람들을 살리려고 했으나,

숨진 사람들의 무덤이다.

 

킬링필드의 주역

폴 포트와 추종세력의 사진

 

전시실의 사진 자료

당시 반동으로 찍힌 사람은 남여노소를 불문하고

고문하여 원하는 답을 얻어내고 죽였다고 한다.

 

 

고문실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했다

 

1인실 독방 감옥

 

물고문 모습과 그 당시 도구들

 

살인기구와 실제 집행사진

뒤통수에서 드릴처럼 손으로 돌리면서

구멍을 뚫어 죽인다고 한다.

 

전시실을 보고나면 마음이 무겁다.

날씨도 덥거니와 마음도 무거워 앉아 쉬고싶다.

정치적인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하나로

어떻게보면 배운자라는이유 하나로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한 사건에 대해 후대는 어떻게 평가할까?

이긴 자의 쿠테타는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세력은 이 나라에도 있는데....

 

2백만이 죽은 킬링필드 당시에

감옥에서 생존한 사람이 7명이 있다고 한다.

그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에 의해 많은 부분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아래 분은 그 분 중의 한 분이다.

부인도 함께 끌려와 죽임을 당하고

본이 만 살아남았다고 책으로 증언하고 있다. 

 

수용소 감옥 주변의 야자수에서 떨어진

열매가 싹을 틔웠다.

세월의 무상함을 보는 듯하다.

 

이름 모를 열대과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세월과 관계없이 열었다 익었다 떨어지고

인간사 짧은 생의 우여곡절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