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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감상

황석영의 밥도둑 2 - 기억의 고리, 그 시작과 끝

by bluesky0321 2020. 6. 6.

 

제 2장 흘러간 사랑의 내용 중 

기억의 고리, 그 시작과 끝의 전문을 싣는다.

 

 

 

 

 

 

기억의 고리, 그 시작과 끝

 

지나간 날의 사랑을 기억해내는 데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 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즉, 여자는 연장되지 않은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현재의 사람에 관한 가까운 기억으로 대치시킨다는 것이며,

아니면 할머니나 삼촌이나 사촌 형제나 또는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를 떠올리듯이

친근하고 일상적이던 추억을 간직한단다.

 

그에 비하면 남자들의 흘러간 사랑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이 퍼즐을 맞추어놓듯이

여자와 가졌던 에로틱한 순간들을 모아서 간직하거나, 좋고 나쁜 일에 대해서도 전체의

줄거리는 잊어버리고 어느 시간의 미세한 부분만을 곰살궂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흔히는 남녀가 그 반대일 것이라고 여기다가도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맞는 구석이 많은 것 같다.

거친 세상이 로부터 따로 떼어놓은 감각적이고 부질없는 순간들과 잠재된 욕정이

오히려 남자들의 옛사랑에 대한 추억의 본모습이라니, 어쩐지 수컷이 슬프게 여겨진다.

 

프로이트 선생의 말씀을 들지 않더라도 성욕과 식욕은

어릴 적부터 잠재되어 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지배한다.

'남녀가 함께 밥을 먹으면 정든다'는 우리네 속담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영혼의 집으로 유명한 칠레의 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와 같이 먹었던

요리에 대한 얘기로 책 한 권을 쓸 정도였다.

 

어느 먼 산골이나 바닷가 어촌에서 두 사람이 먹던 음식의 맛은, 지금 아무데서나

다시 찾아 먹을 수 있는 흔한 먹을거리라 할지라도 다시는 되살려낼 수가 없다.

또한 그녀가 가끔씩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을 준비하던 달그락거리는 그릇 부딪는 소리와,

식탁 맞은편에서 따뜻한 눈빛으로 이 편을 건너다보던 날의 맛을 어디서 되살려낼 것인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물처럼 지나간 시간은 자취도 없지만 그 감각만은 생생하다.

 

전쟁 때, 우리 식구는 지금은 경기도 광명이라고 부르는 괭매이로 피난을 갔었는데

농가의 외양간을 빌려서 여름 한철을 보냈다.

벽이 삼면만 있고, 앞은 툭 터진 대신에 통나무 속을 파낸 여물 구유가 버티고 있었다.

소는 전쟁통이라 없어지고 더러운 건초더미만 쌓였는데, 쇠똥이며 짚 덤불을 깨끗이 치우고 나서

흙바닥 위에 멍석을 깔고 기둥 네 귀퉁이에 모기장을 쳐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도회지 사 람들의 피난살이라는게 어디나 같아서, 쓸 만한 물건들을 식량 가진 촌사람들에게

야금야금 내주며 버티게 마련이었다.

재봉틀이 없어지고 옷가지와 귀금속이 없어지고 자전 거가 사라지는 식이었다.

나는 근처 개천에 가서 송사리도 잡고 개구리도 잡으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렸는데,

지금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내 또래의 계집아이가 생각난다.

 

당시의 시골 아이들은 여름철이면 그냥 고무줄 넣은 검은 무명 팬티 하나로

벌거숭이가 되어 뛰어다녔는데, 그래도 나는 어머니 때문에 위에다 러닝은 걸쳐야 했다.

우리 식구가 빌려 살던 집 건너편에 그 아이가 살았다.

그 아이네 집은 참외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집 앞에 멍석을 펴놓고 참외를 팔았다.

 

함지에 참외나 찐 옥수수를 담아 놓고 아이의 할머니가 나와서 앉아 있곤 했다.

어느 저녁녘에 어머니는 나와 누나들을 데리고 가서 참외를 사주었고

때 계집아이를 알게 되었다.

아이는 시골 아이 같지 않게 누나들처럼 간탄후쿠(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코고무신을 신었던 것도 생각난다.

할머니 와 어머니가 주고받던 먼 고장에 대한 이야기들은 재미있고 신기했으며,

모깃불이 타는 냄새와 별이 우수수 쏟아질 것 같던 밤하늘은 아주 가깝게 머리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멍석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계집아이와 북두칠성 찾기 내기도 하

고 별똥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데 그애 가 나를 불렀다.

그애는 한 손을 치맛자락 안에 감추고 있다가 내게 내밀었다.

그건 방금 솥에서 긁어낸 누룽지였다.

아주 딱딱하게 탄 것이 아니라 거죽의 밥알과 덜 탄 누룽지를 함께 긁어내어

동그랗게 뭉친 것이었다.

사실은 그런 상태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누룽지다.

한입 베어 물면 부 드러운 밥알이 씹히면서도 속에서 바삭바삭 눌은 쌀알이 씹힌다.

 

아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수남아, 너만 먹어!”

나는 누룽지를 받아먹으면서 어쩐지 좀 부끄러웠다.

그 리고 이상하게도 죄를 지은 듯한 은밀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에 고추잠자리가 가득히 날아다니던 날이었으니 팔 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우리 식구는 그 무렵에 괭매이를 떠나 영등포로 돌아갔다.

한낮이었는데 건너편 사립문 앞에서 그애가 나를 불렀다.

마당으로 들어가니 모두 들에 나갔는지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애가 부엌에 들어가더니 큰 쇠솥 안에서 찐 단호박 몇 토막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 마루에 앉아서 함께 먹었다. 호박은 식었지만 말랑하고 단 맛이 그만이었다.

마당에는 장닭과 암탉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벌레 사냥을 하던 중이었다.

그애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면서 눕더니 할머니처럼 배를 쓸어달라고 했다.

나는 참새의 가슴처럼 따뜻하고 쉴새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애의 배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몇 번인가 아래위로 쓸어내리는 중에 갑자기 멈추고는 화가 난 것처럼

얼른 일어나서 달아나버렸다.

고추가 갑자기 뜨겁고 아픈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내가 한 여성에게 이성의 감정을 처 음으로 느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집을 나가서 남도를 돌아다니다가 왔을 무렵이니까, 자신이 이미 세상을 다 겪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흑인 오르페"라는 영화 를 둘이서 보았던 생각이 난다.

 

대학에 갔을 때였는지 군대에 갈 준비를 하던 해였는지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는데,

서해안의 어느 섬에 갔다가 태풍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배가 끊겨서 갇혀 있었다.

몇 가지 특별한 기억이 있다.

민박을 하던 집의 뒷간은 마당 뒤편에 텃밭을 건너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냥 항아리를 묻고 소나무 가지로 나지막한 울타리를 세워놓은 게 전부였다.

그녀가 밤에 뒷간에 가려면 무섭다고 꼭 나를 데려가서 울 밖에 파수를 세워놓곤 했다.

 

그러면 나는 자리 를 떠나지 않고 확실하게 보초를 서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어야 했다.

'날 저문 하늘에 별이 삼 형제 반 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같은 노래였을 것이다.

그 건 누나가 변소에 간 나를 지키러 와서 저도 무서우니까 부르던 노래이다.

 

하여튼 그 집에서 배가 올 때까지 몇 날 몇 밤을 지내는 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에

그 댁 아주머니가 떡을 했 다며 맛이나 보라고 보시기를 우리 문간방으로 건네주었 다.

이게 웬 떡! 호박시루떡이었다.

 

늙은호박을 길게 깎아서 말려두었다가 쌀가루 한 켜, 검 은콩 한 켜, 호박 한 켜를

차례로 깔아 시루에 쪄낸 것이다.

어느 때에는 대추나 밤도 박아넣는다.

박의 단맛은 은근 하고 너무 달지도 않아서 구수한 단맛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뜨거운 떡을 호호 불면서, 가끔씩 손가락에 달라붙는

찐득한 호박을 빨면서 떡을 먹었다.

 

그래서 괭매이의 소녀를 기억해내게 된 것일까, 아니면 괭매이의 단호박을 떠올리다

그 섬에서의 민박을 생각하게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