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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루스카이의 여기저기 자잘한 여행기
도서 감상

황석영의 밥도둑 1 - 유배지의 한끼니

by bluesky0321 2020. 6. 3.

 황석영의 밥도둑은 개정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종이신문이 정보전달매체로써 큰 영향력을 끼칠 때

종이신문 지면에 실었던 본인의 산문을 현시대에 맞게 보완하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책의 내용은

1. 유배지의 한끼니

2. 흘러간 사랑

3. 잃어버린 그 맛

4. 나그네살이

5. 밥도둑, 토박이 음식

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난 2016년 남긴 리뷰는 아래를 참고하자.

 

 

http://blog.daum.net/rosesense/13756921

 

황석영의 밥도둑

'펜은 칼보다 강하다' 이 말이 문득 생각난다 암울했던 군사독재시절, 그래도 황석영 같은 식자가 있어 민주화 운동과 사회운동에 우매했던 시민들을 가슴속으로부터 응어리진 것들을 활화산처

blog.daum.net

 

 

 

 

 

 

책장에 꽂아 둔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좋은 장면은 필사(?)를 해보기로 한다.

 

내가 의미있다고 생각한 장면을 텍스트로 남기면

말 그대로 e-북이 된다.

 

 

1. 유배지의 한끼니

 

철모에 삶아 먹은 닭 두마리

 

술자리나 동창 모임 같은 자리에서 남자들끼리 모이면

가장 오랫동안 끊기지 않고 길게 지속되는 얘깃거리가 바로 군대 이야기다.

군대 이야기는 대개 몇 가지로 그 특성을 집약할 수 있 다.

남들은 다 뭣 빠지게 고생했지만 자기는 요령과 능력을 발휘해서

'재미있고 편하게 군대 생활을 했다'는 것이며,

자기가 얼마나 운좋게 특과로 빠지게 되었는지,

그래서 주 로 상관과 고참을 골탕 먹이면서 위세를 부렸다는 얘기 등이다.

 

얘기 끝에 꼭 덧붙이기를 요새 군대는 아저씨 고참들 말투대로 빳다가 폐지되고

기합이 빠져서 할랑한 민주화가가 된데다, 나라가 살 만하여 '반찬 투정'이나 할 정도로

식사도 좋아졌다고 가볍게 넘어가버린다.

그렇지만 개개인의 속사정을 알고 보면 신성한 의무라 는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에게는 젊은 꿈을 유보 시키고 일정 기간 국가 권력의 군율로

족쇄를 채우는 악몽 임이 틀림없다.

지나고 보면 늘 사람 사는 곳의 그럴듯한 '인정'으로 달리 채색되어 있지 않던가.

처음에 훈련소에 가입대를 하면 비위가 약하거나 도회지에서 반찬을 가려 먹던

젊은이들은 한 이틀은 밥을 먹지 못한다.

훈련을 받으면서 사나흘 지나자마자 꿀맛으로 바뀌긴 하지만...

 

서리한 닭의 털을 뜯고 다시 물을 끓여서 내장도 빼지 않은 채 통째로 넣어 삶았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아니나다를까 곁에 있던 텐트에서

구수한 냄새에 잠이 깬 분대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닭이 대충 삶아지자 우리는 그래도 보급 당사자인지라 닭 다리를 차지하고

몸통이며 다른 부위들은 깨끗이 다른 녀 석들에게 넘겨주었다.

 

돼지는 낚시줄로 잡는다.

낚시바늘에 고구마를 끼워 돼지우리에 던지면 그 중 가장 힘이좋고 큰 놈이 덥석 물고

우적우적 씹는다. 그때 줄을 감으면 낚시바늘이 돼지의 혀에 탁 걸린다.

우리의 문을 열어주고 살살 당기면 돼지는 버티지 못하고

골골골 낮은 소리를 내면서 잘도 따라온다고,

 

그날 밤 벽지의 초소에서는 난데없는 잔치가 벌어졌지만

이튿날 일대 색출 작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땅에 파묻었 던 돼지의 네 굽이 나오는 바람에 들통이 나서 전 소대원의 봉급이 몰수되고

갹출까지 해서 돼지값을 물어주고도 주동 자는 사단 영창살이를 했다나.

 

어느 통신 부대 출신의 친구에 따르면, 전봇대 애자를 깨면 안에 노란 유황이 들어 있는데

그게 닭서리에 그만이 라고 한다.

유황 덩어리에 불을 붙여 닭장 안으로 던져놓으면 노오 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횃대에 올라앉았던 닭들이 비실거 리며 아래로 툭툭 떨어진다고 한다.

그때 포대를 들고 들어 가 슬슬 주워 담아서 유유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건빵 다섯 봉지와 행복한 죽음

 

훈련병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기간 사병이 된 이후에도 교육을 받을 기회가 생기는데,

보통 때에는 군대의 세 끼 니를 지겨워하던 녀석들도 꼭 피교육자 신세가 되면

두 가지 병이 도진다.

하나는 앉으면 저절로 눈이 감기는 졸음병이요,

둘은 주는 대로 먹기는 했지만 식사를 하자마자 다시 시작되는 배고픈 병이다.

이 허기증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어 교육 기간 내내 뭔가 배워야 할 내용은 들어오지 않고

온통 먹을 것 생각만 하다가 끝난다.

전쟁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먹는 타령은 세계 공통이다.

 

대개 훈련병 시절이나 재교육 기간에 기다려지는 게 주말의 면회 시간인데,

모두들 잔뜩 벼르다가 식구나 친지를 만나는 자리라 반가운 인사는 대충 치워버리고

그들이 들고 온 보퉁이에만 정신을 판다.

갈비며 불고기는 초창기의 일이고 몇 차례 거듭되다보면 가족들도 눈치가 있어서

값 싸고 양 많은 것으로 싸오게 마련이다.

시루떡, 인절미부터 전붙이와 호빵, 만두, 김밥, 심지어는 찐 고구마 등속인데,

이런 것들을 잔뜩 먹고 나서 허리춤에 싸들고 들어온다.

숨겨 들여오는 음식을 전우들에게 나누어주는 경우도 있겠지 만,

대부분은 침상 밑에 감추어두고 배고플 때 야금야금 먹어치우려는 속셈이다.

 

교육기관의 하사관들도 모두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서 몇 가지 기합으로

통과의례를 준비해둔다.

우선 내무반에 들어서자마자 신고도 받지 않고 쪼그려뛰기부터 실시한다.

몇 번 뛰지 않아서 허리춤에 차고 온 먹을거리들이 툭 툭 떨어지고 즉각 압수 처리된다.

전우애를 발휘시켜주기 위하여 다른 소대원들에게 분배되는 건 물론이다.

그리고 면회자 중 거의 절반 정도는 이튿날 배탈이 난다.

 

광주에서 10·26 직후에 계엄법 위반으로 상무대 감방에 갇 혀 있을 때에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내 독자라는 헌병이 가끔씩 요기하라고 건빵 한 봉지씩을 주었는데,

주위에 몇 알 씩 나눠주고 나서 담요를 둘러쓰고 건빵을 한 알씩 천천히 씹어 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게 먹으려 해도 와삭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그 병사도 남들이 모두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여튼 와사삭와사삭 씹어서 그 건빵 다섯 봉지를 새벽녘에 모두 해치웠건만,

취침 시간에 화장실을 가도 신고를 해야 되는 터에 물을 마실 재간은 없었나보다.

건빵이 비상식량인 것은 뱃속에 들어가면 몇 배로 불어 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장은 물론 식도까지 꽉 막힐 수밖에.

그렇게 한 젊은 병사는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다.

 

 

법무부 한정식

 

미셸 푸코는 권력의 전형들을 다루면서 군대와 감옥을 예로 들었다.

군대와 감옥은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규율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길을 들이는 곳이다.

이러한 체제가 병원과 학교의 통제까지 형성한 셈이다.

 

규율이라면 소싯적부터 지긋지긋했던 터에 군대 삼 년에 감옥에서 다섯 해를 지냈으니

한번 맛 좀 보라는 팔자였던 모양이다.

구치소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식사가 좋은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은 형이 확정되지 않았으니 죄인은 아닌 셈인데다,

날마다 가족 친지들이 면회를 오고, 걸핏하면 변호사와 접견을 하게 되어서

관에서도 신경을 써주는 편이 었다.

 

이른바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때려 조지고, 가족은 팔아 조지고, 피의자는 먹어 조진다'는

말처럼 친지들이 차입해준 구매물이 넘쳐나고 영치금도 쌓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돈도 빽도 없고 가족들도 돌아보지 않는 ‘개털’ 잡범들의 신세도 구치소 시절에는

영치품과 구매물의 인심이 후해서 살도 통통 찌고 속옷이나 침구 같은 준비도

구치소에서 마련하곤 했다.

 

사식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경제사범 같은 '범털들은 관식을

거의 먹지 않고 입맛대로 골라 먹었다.

범털들은 구치소 식사를 '법무부 한정식'이라고 불렀는데,

구매물에는 없는 것이 없어서 밥과 국, 그리고 찬 두 가지의 규정식 외에

김, 각종 나물, 젓갈, 장조림, 장아찌, 통조림 등등 한 열 가지 이상을 주욱 늘어놓고 먹었다.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라 교도관들도 점심에 직원식당으 로 가지 않고

'소지'라고 하는 봉사원이 차려주는 백반상을 받았다.

 

'소지'는 한자말로 청소를 뜻하는 '소제'의 일본식 발음이다.

제도가 말을 규정한다고도 하고 그 반대라고도 하지만, 일제 시대 거의 그대로의 행형 제도가

아직도 옥내용어를 일본말로 남겨두고 있는 셈이다.

하여튼 그래서 평균 육 개월씩 잡아서 나와 함께 생활한 소지가 오 년 동안 십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사동 안팎의 청소를 담당하고 하루 세 끼니의 배 식을 하며,

안에 갇혀 있는 수인들과 복도에서 수직하는 교도관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한다.

그리고 수인들의 방에 서 일어나는 일거일동을 담당에게 알려주는 은밀한 임무도 맡는다.

특별 독거수가 된 나 하나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이라 그랬는지

소지들은 서로 내 담당이 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대개가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라 내게는 거의 아들뻘이나 마찬가지였고

죄명도 갖가지였다.

겪다보니 내게 소지로 오는 아이들 대부분이 절도가 아닌가.

같은 죄수 신세로 그들의 수발을 받는데 별다른 불평이 있을 리가 없지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관구계장에게 물었다.

"어째서 내게 보내는 아이들은 모두 절도 출신입니까?"

“왜요, 뭐 불편하세요?"

“아니, 점잖게 탈영병이라든가 혹은 교통사고라든가 있지 않소.”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오죽 게으르면 군대 생활도 제대로 못 견디고 탈영을 했겠어요.

교통사고 출신도 젊은 애들 은 거의가 음주에 뺑소니에 인명 사고인데,

놀기만 좋아하고 뺀질뺀질하지요.”

 

“그럼 절도는?"

“도둑질, 그거 부지런해야 먹구삽니다. 미리미리 털 집을 봐둬야죠,

시간 맞춰 현장 도착해 망봐야죠, 숨어서 기다려야죠, 직접 털어야지요.

무거운 짐 지고 도망가야죠, 장물아 비 찾아서 처분해야지...... 한두 가집니까?

그애들 여기 오면 참 양순한 애들입니다.

부지런하고 순하고 아주 소지로 맞춤하지요.”

나는 계장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다분히 일리가 있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교도소 수인들 사이에서도 절도는 그냥 '도둑놈'이라고 하여 서열상 맨 아래다.

그것은 교도관들이 수인들을 멸시하여 부르는 총칭이 '도둑놈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맨 위가 깡패들을 부르는 '조폭'이며

우습게 취급받는 이들은 물총'이라고 하는 강간범인데,

처음에 신입으로 입방했을 때만 그렇지 결국 이들도 절도 취급은 받지 않는다.

절도는 결국 서럽고 배고픈 놈들이라는 점에서 감옥 먹이사슬의 맨 하위 계층인 셈이다.

 

나는 이 단순한 젊은이들과 매일의 끼니를 의논하며 살 아가는 동안에

그들을 친조카나 자식처럼 사랑하게 된 경우도 여럿이었다.

언젠가는 '소지열전'을 써보고 싶은 생각도 있을 정도다.

 

건오라고 해두자. 건오는 문화재 절도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을 해서 계모 밑에서 시달리다가

부산으로 가출을 했다.

중국집 배달 소년에서 시작하여 음식점을 전전하면서 경양식 기술을 익혔다.

부지런히 벌어먹고 살 만한데, 전에 같이 일하던 녀석이 절도로 몇 번 소년원이며

교도소를 들락거리더니 유명한 절집에 가서 금불상이며 탱화며 하는 값진 것들을 털어왔다.

그래서 그 장물들을 건오 자취방에 맡겨두었다.

 

일부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 같이 동거하던 술집에 나가는

여자친구가 돈이 궁색하여 몰래 금불상 하나를 내다가 골동품점에 팔려고 했다.

주인은 대번에 이것이 수배된 장물인 것을 알아보고 신고했다.

그래서 건오는 영문도 모르고 일망타진된다.

내가 건오를 잊지 못하는 것은 열여덟 차례의 단식을 했던 중에서

가장 길고 혹독했던 이십이일간의 본단식과 한 달 남짓한 복식을 치른

그 긴긴 겨울을 함께 보냈기 때 문이다.

 

 

범치기 요리

 

정치범의 단식은 대개 세 가지 이유로 시작된다.

첫째는 그야말로 정치적인 이유로, 바깥 사회에서 대의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 발생했다든가

해마다 돌아오는 광복 절이며 삼일절이며 하는 날에 맞춘 정치적 행사로서 하게 된다.

 

둘째는 옥내의 정치범 처우에 관한 것으로, 이를테면 편 지 검열이라든가 금지된 서적이나

면회의 제한 등등 사상 표현의 자유에 관한 사항들에 대해서다.

 

셋째로는 일반수들의 생활에 관한 것들로, 가장 빈번한 것이 먹는 문제인 주부식 개선이며

의식주 문제, 구타 욕설에 관한 문제, 면회 서신 문제, 운동 시간 문제 등등이다.

 

대개는 일주일이 가기도 전에 서로 타협이 이루어져 개선이 되거나 해결이 되어 단식이 끝나지만

어떤 경우는 양 측이 팽팽히 맞서서 보름을 넘기기도 한다.

단식은 그야말로 음식물을 대번에 딱 끊는 것이다. 처음에 사흘이 가장 어렵고

나흘, 닷새째가 되면 안정이 된다.

 

나는 사회에서도 체질 개선이나 대안 의학에 관한 책들 을 보고 단식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비록 예비 단식 기간이 없었지만 정장제인 마그밀을 먹고 고무호스로 관장을 하고 나서

물만 마시며 버티었다.

1.5리터짜리 페트병에 담 아온 냉수를 하루에 마셔야 했다.

일주일 가까이 되어가면 먼 데서 된장국을 실은 배식 밀 차가 출발하자마자 그 냄새를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운동 시간에는 나가서 한 시간씩 걸었으니 거리로 치면 6킬로미터쯤은 되었을 것이다.

 

보름이 넘어가면 음식물이 존재하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되고 잠이 적어지며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추위는 뼈에 스미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때에 내가 생각 못했던 점이 있었 는데, 속은 좋아지는지

몰라도 체내에서 칼슘이 급속하게 빠져나가는 관계로 이에는 최악의 영향을 준다고 한다.

 

역시 그래서인지 정치범들치고 몇 년 살고 나와서 이가 성한 사람이 드물다.

그렇게 건강하던 문익환 목사의 경우에도 감옥에서 한 번 살고 나올 때마다

이가 서너 대씩 빠졌다고 한다. 내 경우에는 위에 여섯 대, 아래에 다섯 대 해 서 열한 대가 망가졌다.

그래서 석방 후 임플란트를 해넣느라 3년 넘게 치과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따져보니 한철에 한 번씩은 단식을 했던 셈인데 모두 열대여섯 번쯤 되는가보다.

길게는 이십일 이상이나 한 적도 있다.

 

문제는 단식을 끝내고 복식을 시작하는 단계인데, 바로 이때야말로 가장 어렵고 위험한 기간이다.

그리고 이 기간의 음식맛은 마법처럼 오묘하고 기가 막히다.

육식이 얼마 나 사람에게 맞지 않는 음식인가는 이때의 냄새로 알 수가 있다.

거의 누린내 비슷한 썩은 냄새가 나고, 생선 비린내 는 식사 때가 지나고 나서도 온 사동에

하루 온종일 배어 있는 것을 느낄 정도다.

 

내가 잊지 못하는 '내 새끼 건오'는 단식중에도 국그릇 을 살그머니 식구통 안으로 들여놓고는

하다가 내가 호되게 야단을 치고 나서 그만두었는데, 복식을 하게 되자 나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취장에서는 환자용으로 신청하면 죽과 미음을 준비해주는데

그냥 쌀을 대충 갈아서 끓인 멀건 흰죽이었다.

 

건오는 이 흰죽을 받아두고, 취장 아이들에게 납작보리를 얻어다 주전자에 푹 삶아 으깨어

이것을 흰죽에 넣고 다시 끓여다. 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냄새에 이끌려 관급 된장을 얻어다가 살짝 넣어 끓이도록 했는데,

된장에 끓인 보리죽의 그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하여 아침에 속이 더부룩하거나 좀 굴풋한

밤중에 곧잘 끓여먹는다.

 

쌀과 보리를 대충 설갈아서 멸치 다시 물에 된장을 풀어 끓이는데, 이때에 미역을 잘게 썰어서

넣거나 아욱이나 시금치를 잘게 썰어 넣고 끓이면 더욱 맛있다.

 

그리고 이월 중순이 넘어가면 양지바른 곳에 이른 봄쑥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데,

건오와 나는 운동 시간에 나가면 교도소의 기다란 담 밑에 돋아나기 시작한 여린 쑥을 뜯곤 하였다.

한 시간쯤 뜯어 한두 줌이 되면 복도의 난로에 주전자를 얹어놓고 먼저 다시를 낸다.

멸치를 구하면 좋겠지만 없을 때에는 마른 오징어 다리를 전날 찬물에 담가 두었다가

부드러워진 것을 팔팔 끓는 물에 넣고 우려내면 제법 구수한 맛국물이 된다.

여기에 된장 풀고 여린 봄쑥을 넣어 쑥국을 끓이는데, 향긋한 냄새가 온 사동 안에 진동할 정도다.

 

명절 무렵이면 재소자들은 슬슬 양조를 준비하게 된다.

감옥에서 술은 물론 엄금되어 있는데, 추운 겨울철이나 명절이 돌아오면 검방에 간을 졸여가며

술을 담근다.

매점의 구매 물품인 요구르트를 사다가 음료수병에 쏟아 붓고 곰팡이 피운 빵을 뜯어 넣고는

원기소를 넣은 뒤에 양지바른 창가에 놓아두면 일주일쯤 지나서 먹을 수 있다.

포도주스에 설탕과 곰팡이 띄운 빵을 뜯어 넣으면 포도주 비슷한 과일주가 되기도 한다.

옆방이 돌연 술렁술렁하고 누군가 헛소리를 하든가 노래를 부르면, 저 방에서 지금 밀주를

개봉했다는 것을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건오 뒤에 몇 차례 건너서 내게 오게 된 소지 아이로 의영이란 녀석이 있었는데 그는 조폭이었다.

그러나 보스 급 은 아니고 이른바 어느 지역의 독불장군 비슷한 아이였다.

아이는 천성이 착하고 조용했지만 일단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하고 무지막지해졌다.

녀석의 배에는 구렁이가 지나간 것 같은 상처가 있었는 데 칼을 맞고 수십여 명과 싸운 상처라고 했다.

 

의영이는 시골 읍내가 도시화의 개발 바람을 맞으면서, 외지의 폭력배와 투자자들에게 저항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깡패로 나서게 된 아이다.

나는 의영이와 함께 사동 사이에 있는 좁은 빈터를 빌려서 채소를 가꾸었다.

상추, 쑥갓, 케일, 열무는 씨를 뿌려서 가꾸고 고추, 가지, 오이, 호박, 깻잎 등속은 이른봄에

비닐 조각을 얻어다가 온상을 만들어 모종을 내어서 옮겨 심었다.

그리고 가을철에는 배추를 모종하여 심었다.

 

우리는 텃밭 가꾸는 일에 흠뻑 빠졌고, 여름날 여린 열 무청을 썰어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거나

라면을 삶아 헹궈서 열무를 썰어 넣고 비빔국수를 해먹기도 하였다.

간장과 된장에 깻잎을 담가두었다가 겨우내 먹기도 했 는데, 특히 가을에 걷은 배추를 갈무리하여

겨우내 쌈도 싸 먹고 무쳐 먹기도 했다.

배추를 신문지에다 겹겹으로 싸서 매점에서 빌려온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서는 계단 밑 으슥한

비품 창고에 보관하면, 배추가 잎이 마르지도 않고 겨우내 방금 밭에서 뽑은 것처럼 싱싱했다.

 

된장과 마가린과 삶은 감자 등속으로 짜장면 비슷하게 만들어 먹기라든가, 삶은 라면발에 두유를

부어서 콩국수 를 만들어 먹기, 또는 국에서 건진 두부와 콩나물과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를 다지고

밀가루 반죽을 밀어서 만두 해먹기 등등의 짓들은 대개 징역 삼 년이 넘은 고참들이나 하는

'범치기' 요리이다.

 

나는 석방되던 마지막 해의 겨울에 눈 오는 날, 카드깡으로 들어온 준식이와 부쳐 먹던 김치전을 생각한다.

우리는 무기수인 영선반 작업반장에게 부탁해서 양천 프라이팬을 마련했다.

그것은 난로의 연통을 길게 펴서 네 모반듯하게 사방을 접어 올린 것이었는데, 굵은 철사로

손잡이까지 만들어 달았다.

 

실내에서는 다른 재소자들 눈이 있으니까 '만기방' 이라고 석방 이틀 전에 나가서 묵는 독립 사동에

가서 연탄아궁 이 불에다 부침개를 부쳤다.

머리 위로는 싸락눈이 풀풀 날 리고 우리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마가린을 프라 이팬에 녹여

김치를 섞은 밀가루 반죽을 부어서 부쳤다.

역시 김치부침개는 잘 익으면 가장자리가 아삭거리고 고소하 고 제일 맛이 있다.

거길 떼어 먹다가 바라보니 준식이 눈에 눈물방울이 고였다가 톡 떨어진다.

“왜 그래, 뜨거워서 그러냐?"

"아니요.”

"그럼 뭣 땜에 그래?"

"어머니 생각 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