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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감상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 - 류근 산문집

by bluesky0321 2021. 2. 3.

류근시인을 알게 된 것은

KBS 시사프로 중 '역사저널 그날'이라는 방송을 통해서이다.

 

이후 폐북질을 통해 시인의 생각과 감정이

약한 자를 보듬고, 아픈 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내 가슴에 와 박혔다.

 

글 끝마다 관용구적으로 붙이는 '시바'라는 

추렴도 왠지 정겹게 들리는 것이 이외수선생의 '존버'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류근시인은

이외수시인과도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며 형, 동생하는 사이였던 것이었다.

 

 두 시인의 결이 닮아있다.

나도 두 시인과 결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두 시인에게 그 결을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며,

시인은 '우리들의 선생님'이란 글을 아래와 같이 썼다.

 

선생님, 제게 글자 쓰기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덧셈, 뺄셈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구구단 외우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토끼 키우기, 닭장 만들기, 찰흙으로 연필꽂이 만들기,

색종이로 카네이션 만들기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미끄럼틀에서 떨어졌을 때 업고 병원에 가주셔서 고맙습니다. 

소풍 가는 길에 롯데 이브껌 주셔서 고맙습니다.

졸업식 날 사진 찍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인환 시집 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집에 불러서 오뚜기 카레 먹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전학 가는 날 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겨울에 백일장 나갔을 때 낮술 사주셔서 고맙습니다.

담배 피우다 들켰을 때 라이터만 뺏고 안 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파출소에서 뒤통수만 한 대 때린 후 데리고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다 알면서 속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실패에 슬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게 선생님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바닷물에 잠겨 죽을 때에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우리 곁에 계셔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

 

류근시인이 학창시절일적에

가수 김광석과는 형, 동생하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김광석 3

 

나는 오래된 동네의 뒷골목 여인숙에 방을 잡고서

하루종일 그를 추모하는 자세로 술을 마셨다.

명왕성의 단골 여인숙으로 가고 싶었으나 여비가 조금 부족했고

눈물도 아무 때나 흘러내렸으므로(안구건조증의 후유증임)

그냥 아무 데서나 쓰러지자는 심정으로 호젓이 뒷골목으로 흘러들었다.

 

과연 오래된 동네의 뒷골목은 호젓하고도 호젓하였다.

누군가 보내온 김광석의 노래들을 들으며

나는 옛날의 내 슬픔과 쓸쓸함을 조금 기억해내었을까.

호올로 취해도 좋을 법한 인생이 오로지 내 것이라는 자각이

나를 충만케 하였다.

 

아직도, 여전히, 끈질기게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가사를 내가 썼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는 별로 유감이 있지 않다.

그들은 내가 이 겨울에 토끼처럼 잠을 자고 공작새처럼 추위에 떨며

안나푸르나처럼 고독하다는 사실에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열세 살에 충주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잃어버린 자전거를 가끔씩 잊고 산다.

아, 그 파란, 신신약국 아줌마한테 4천 원 주고 산 중고 자전거....... 시바,

 

시래기마저 다 떨어지자 바야흐로

이 겨울이 불안의 무게로 덤벼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세 개의 라면과 한 개의 3분카레가 남아있다.

적어도 사흘 안에 굶어서 죽을 일은 없을 테니 이 어찌 역군은이 아니실 텐가.

 

김 광석 기일 다음 날이 되자 오히려 괴이하게도 서럽고 막막하다.

오늘은 노혜경 시인 북콘서트에도 가야 하고

좀 이따 좀 예쁜 애인과 낮술도 좀 마셔줘야 하는데 아침부터 술 생각..........

시인이 되기 전에 폐인에 이르렀으니 아니 마시고 또 어찌할 것인가.

류근이여, “우리 이제 다시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다.

아아, 시바. 조낸 시바,

 

이 글을 읽으니 엄마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는다.

 

국화 한 송이 

 

어느 가을날이었을까.

어머니가 국화 한 송이를 사 들고 들어오셨단다. 

큰누나 : 엄마, 우리 쌀이 다 떨어졌는데.. 

엄마 : 안다.

큰누나 : 그런데 웬 국화...

엄마 : ...

 

한 40여 년 동안 나는 우리 남매들에게 '철없는 엄마에 대해서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고 들었다.

새끼들을 다 굶기면서도 꽃을 사 들고 들어오는 철없는 과부 엄마....

 

어머니 돌아가시기 한 두어 달쯤 전에 문득 말씀하셨다.

엄마 : 그날 쌀을 사러 나갔는데 반 봉다리도 살 돈이 없었다.

외상도 너무 많아서 더 어떻게 애걸할 면목도 없더구나,

딱 국화 한 송이 살 돈이 있길래 그걸 샀지.

내가 나를 위로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거든.

 

나도 오늘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국화빵이라도 한 개 살까. 

세상에 남겨진 내가 참 서럽다. 시바,